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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LECTURE] 젠더X국가 : 강연 <SM페미니즘>
NeMaf 조회수:4326 추천수:6
2019-08-21 13:07:05

20일 롯데시네마 홍대 입구 14시 50분 [젠더X국가] 섹션의 파올라 칼보 감독의 <바이올렌틀리 해피> 상영 후, 16시 30분 임옥희 교수의 [젠더X국가 : 강연 <SM 페미니즘>]이 시작되었다. <바이올렌틀리 해피>에서 다루어진 BDSM과, 페미니즘에 관한 코멘트와 질의응답을 관객과 주고 받는 형식의 강연이었다. 이 날 진행은 김장연호 집행위원장이 맡았다.

 

먼저 강연을 진행해 주실 임옥희 교수를 소개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올해 네마프와 협력해 작품을 상영하도록 도와 주신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이하여이연’) 신주진 대표의 인사를 들어 보겠습니다.

 

신주진 : 여이연은 97년 창설된 이래로 여러 연구자들이 모여 현재까지 페미니즘 운동에 관해 논의하는 단체입니다. 매년 여름과 겨울 방학 시즌에 강좌도 진행하고 있고, 연 5,6회 가량 콜로키움도 진행하고 있으며, 여성 이론에 관한 책도 출간하고 있습니다. 또한 격년으로 학술 대회를 열고 있는데, 올 12월엔 ‘디지털시대의 섹슈얼리티’ 라는 주제로 열릴 예정이니 많이 방문해 주시면 논의가 더욱 확장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강연에서는 한국 페미니즘의 산 증인이신 임옥희 교수께서 좋은 얘기 많이 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주제전은 항상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에서 자체적으로 기획을 해왔었다가 올해는 생각을 조금 바꾸어 다른 단체나 기관과 협력해 프로그램을 알차게 꾸며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젠더X국가의 주제와 적합한 단체들에서 추천해 주신 작품들로 기획을 봤습니다. 방금 상영된 작품은 여이연과 임옥희 교수님의 추천으로 상영하게 되었는데요. 역시도 임옥희 교수의 저서로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오늘 강연은 SM 페미니즘이라는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많이 이슈화되지 않은 내용으로, <바이올렌틀리 해피>라는 작업과 SM 페미니즘을 연결지어 고찰해보는 자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봅니다. 그럼, 여기서 임옥희 교수께 마이크를 넘기겠습니다.

 

임옥희 : 영화를 본 후 충격을 받아 아직 정신이 없지만, 강연을 시작한 만큼 잘 끝맺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에이섹슈얼과 마찬가지라 생각하고 섹슈얼리티에 관해 평상시에 그다지 생각을 하지 않는 편이지만, 방금 상영된 작품 <바이올렌틀리 해피>를 본 후, 가장 강렬한 문제에 대해 생각하도록 했다는 부분에서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북 클럽>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극 중 주인공인 노인들-4명의 친구들-은 40년간 독서 클럽 활동을 하고 있는데요. 어느 날 모임 도중 한 명이 자기 인생의 전환점이 된 책이 하나 있다며 같이 읽어볼 것을 제안합니다. 저는 텍스트를 선호하는 부류의 인간이기 때문에 ‘대체 60이 넘은 노인들이 읽고 인생이 바뀌었다는 책이 무엇일까’가 굉장히 궁금했었어요. 그 책은 바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였습니다. 1억 이상의 조회수를 자랑하던 웹 소설이었던 이 작품은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고, 영화까지 제작되었을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BDSM이 주된 소재인 소설입니다. 거기에 여성들이 끌린 이유가 무엇일까가 굉장히 궁금했습니다. 예전에, 저는 게일 루빈의 <일탈>이라는 책을 번역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일탈>을 번역했을 땐 BDSM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만 그 책의 소개글에서 저는 ‘정치적 BDSMer’가 되어야한다는 입장을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BDSM은 도착적인 성애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질적인 BDSM에 대해 제대로 알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해서 이 <바이올렌틀리 해피>를 추천하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같이 본 여러분들과 토론의 장을 열고 싶습니다. BDSM에 관한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 나갈 수 있을 것인지, 페미니즘과 BDSM이 양립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해 보고 싶습니다. 또한, BDSM은 여성의 행복 추구권이나 여성 해방이라는 이념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가져 봅니다. 이런 부분들에 대해 질문이나 코멘트를 주시면 함께 논의해 보는 방식으로 강연을 진행하겠습니다. 우선 여이연 신주진 대표께서 화두를 던져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신주진 : 영화를 고른 사람이 접니다. 사실 잘 모르고 골랐는데, 한 웹진에서 소개 기사를 보고 이 작품에서 다루는 ‘공동체’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또한 섹슈얼리티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BDSM이 어떤 형태를 띠는가 하는 일차적인 고민도 있었구요. 그러한 일차원적인 궁금증 때문에 이 영화를 골랐는데, 보면서 굉장히 철학적인 영화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등장인물들이 모두 아티스트들이고, 자신의 몸과 존재에 대해 탐험하는 과감한 모험가들같다는 인상을 받았구요. 젠더의 정체성의 경계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편으로는, 작품에 등장한 ‘하우스’의 주인이 굉장히 제왕적이라는 생각도 들었구요. 아무튼 이런 지점들에 대해 얘기를 나눠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임옥희 : 흔히, 헤테로섹슈얼이라는 것 자체가 굉장히 실용적이잖아요? 결혼이나, 하다 못해 섹스에서의 체위도 결국 재생산이 목적인 것이고. 그런 사회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일반적인 질문이 하나 있어요. ‘좋았어?’. 근데 이 작품에서 흥미로웠던 지점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아?’라는 질문이었구요. BDSM을 몸이 가진 극한까지의 감각과 만나는 관문으로 여기며, 고통을 통해 육체적인 한계의 확장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과연 철학적인 영화라고 할 만한 것 같습니다. 몸은 곧 예술이라 여기는 것과, 지배자인 ’돔’이 아닌 ‘섭’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육체의 쾌감이 어떤 때 강하고 어떤 때 희박한지 연구하는 모습을 보며 대단히 학구적인 사람들인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섹스는 예술이고 춤이며, 세계와 만나는 하나의 공간이라는 것을 BDSM이라는 수행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또 신주진 대표의 입장처럼, ‘왜 백인 중년 독일인 남성이 저 하우스에서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까’라는 생각도 했구요. 마치 BDSM이 종교의 의식과 같이 굉장한 수행을 요구하는 행위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행해지는 일차원적인 ‘재생산’만을 목표로 하는 성 행위와는 달리 BDSM은 굉장히 귀족적인 행위입니다. 인공적으로 자기 몸을 확장시키는 방식이기도 하고요. 또 다른 의견 있으십니까?

 

관객 1 : 작품을 보며 이 ‘BDSM 공동체’라는 것이 정상 규범과는 분리된, 은폐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BDSM을 공공성의 확장이나 정치성까지 이어갈 수 있을까요?

임옥희 : 이 폐쇄적인 ‘해방구’에서 BDSM을 수행하며 얻은 해방감이 다시금 사회가 더욱 원활히 유지되도록 환원되는 방식이라고 한다면, BDSM이 가질 수 있는 정치성은 어떻게 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저도 계속 고민하는 질문인데, 일단은 페미니즘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게일 루빈은 그의 저거 <일탈>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가죽(매듭)은 피보다 진하다’. 그 말을 이 상황에 대입해 보면, 생물학적 가족(‘피’)이 아니라, 공동체(‘가죽’)에 속한 BDSMer들간의 관계들이 괴상한 ‘퀸쉽’을 형성할 수 있을 정도로 나름의 대안적인 라이프스타일의 일종이 되는 것 같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기존의 사회가 BDSMer들을 도착증이나 변태성으로 치부하며 배제시키는 모습이,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특정한 사람들을 지배하는 구조가 어떻게 유지되는지를 뒤집어 보여주는 증거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과연 헤테로섹슈얼 가정이 과연 얼마나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요? 우리 사회는 일상 속에서의 지배적인 권력 관계는 당연하다 여기면서 인공적인 무대-상호가 동의한 ‘안전’한 상황-에서의 권력 관계는 도착적인 것으로 몰아가는 모순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성적 규범이 거꾸로 뒤집힌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BDSMer들이 자신을 오픈하는 것을 도착증이나 변태성이 아니라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서의 섹슈얼리티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조금 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닐까 싶습니다. 미국의 경우에는 부모가 SMer라면 자녀를 격리시키기도 합니다. 그들을 반사회적 인물들로 보는 것이죠. 사회가 SMer들을 가장 비체화된 섹슈얼리티로 보는 시선에 대한 저항의 지점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은가 하는 기대를 합니다. 스스로를 개방해야 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자본주의의 소유관계에 속하지 않을 수 있는 대안적 공동체로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관객 2 : 저는 외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외부인의 시선으로 한국 사회의 젠더 의식을 관찰하자면, 굉장히 생물학적이고 이분법적인 시선으로 젠더를 구별하는 사회로 보입니다. BDSM처럼,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굉장히 바람직하고 재밌는 것 같긴 한데,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두려움 없이 BDSMer들을 격려할 수 있을까요?

임옥희 : 한국 사회에서도 이걸 상영하는 게 사실 쉽지는 않아요. 검열의 위험이 있거든요. 이런 공적인 영화제에서 이 작품을 상영해준 것 자체가 획일화된 한국의 남성 중심 헤테로섹슈얼 사회에 균열을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닌가 싶습니다. 견고한 스테레오타입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파괴적인 힘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두고 조용히 스며들어 균열을 내는 방법이 때로는 효과적이기도 합니다.

 

관객 3 : BDSM이라는 성적 장르는 해외에서 더 많이 소비돼 온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과연 한국 여성들이 이 토픽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안전한지? 또한 BDSM에 관한 논의는 진보적 사회에서만 가능한 건지? 한국 사회와는 적합한지?

임옥희 : 젊은 여성들은 그다지 거부감이 없다는 얘기를 많이 해요. 페미니즘의 발달은 진보적인 사회에만 국한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다만, 지역에 따라 다른 형태로 드러나지 않을까 싶네요. 우리 사회는 엄격한 금기가 많아서 BDSM을 오픈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래 전부터 한국엔 레즈비언 소사이어티도 존재했지만 그것조차도 오픈하기 힘들었잖아요. 어떤 공격을 받을지 알기 때문에 ‘안전’이 최우선인 모임을 만드는 것 자체가 정치적 움직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부분에서는 시차, 편차가 있는 것 같습니다.

 

관객 4 : 질문이자 코멘트이기도 한데요. 작품 속 ‘필릭스’ 라는 인물이 커뮤니티에서 행하는 것이 일종의 정신적, 신체적 ‘훈련’의 모습을 띠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아마 과거에 안무가였던 배경이 있던 것 같은데, 본인의 성향 때문에 예술계에서 축출된 트라우마가 있고, 자신이 현재 활동하는 커뮤니티를 통해 다시 예술 무대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는 욕망이 비춰졌습니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임옥희 : 채찍질을 어느 강도로 해야 고통의 쾌락이 극대화되는지에 대해 연구하고 수행하는 모습이 종교적으로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필릭스’는 통상적인 주류 예술계로부터 배제될 수 밖에 없었고, 연금도 끊어졌습니다. 저 역시 그가 메인스트림은 아니지만 도착과 변태의 포르노 집단에서의 행위를 통해 다시 예술로써 무대에 오르길 꿈꾸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저 사람은 사이비 종교의 목사나 밀교의 구루처럼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착취하는 방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경계심도 생겼습니다. BDSM이 가지는 특징은 ’상호 동의와 합의’ 안에서 가장 안전하게 행해지며 끊임없는 대화가 동반된다는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간의 섹스만큼 몸이 가진 다양성을 봉쇄하는 행위는 없는 것 같습니다. 삽입 - 섹스 - 사정으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가장 심플하고 상상력 없는 행위일 뿐입니다. 헤테로섹스는 ‘재생산’ 말고는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섹슈얼리티를 이용한다거나 몸의 언어화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필릭스’에게 어떤 거부감이 들긴 했지만, 영화 전체를 보고 나면 그는 또 어딘가에 내몰려 헤맵니다. 그것은 도심이 소수자들을 어떻게 배치하는지 얼핏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성적 소수자들은 계속 주변화되고 변두리로 내몰리게 되는 것이지요.

 

관객 5 : 저는 이 작품을 보지는 못했지만 SMer이자 페미니스트입니다. SM이 과연 정치적인 것인가 여권 신장에 도움이 되는지가 궁금합니다. 어느 책에서, 예전에 백인과 흑인의 계급이 달랐기 때문에 서로 각자의 인종으로 분장하는 축제를 하며 잠시나마 현실에서의 억압이나 차별을 해소하곤 했다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백인들이 자신의 권력을 더 잘 유지하도록 하는 수단으로 축제를 사용했다는 것이죠. 그처럼 ‘펨돔’과 ‘멜섭’의 관계 역시 잠깐의 유희를 통해 젠더간의 권력 차이를 해소하고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왔을때 여성이 남성에게 더욱 잘 순종하게끔 만드려는 목적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그래서 다시 한 번, SM이 과연 정치적인가 하는 물음이 있어요.

임옥희 : 당연한 질문입니다. BDSM에서 ‘섭’이 대변하는 ‘여성성’과 페미니즘의 가치가 충돌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 때문에 탈 정치적이지 않냐는 질문은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질문 같구요. BDSMer들이 ‘우리가 반드시 정치적이어야 하는가’라는 반문을 던지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습니다. ‘해방구’, 즉 권력의 역전이 일상으로 재포섭되기 위함으로써 기능한다는 입장도 생각해 볼 수 있고, 꼭 그런 식으로 고착된 것은 아니고 현실에서 다른 방식으로 영위되기도 한다는 입장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BDSMer들이 혁명가는 아니지만, 자기 삶을 달리 볼 가능성을 열 수 있고, 자기 몸을 각성하는 능동적 방식의 도구로 BDSM을 이용한다면, 성적 주도권, 자율성이라는 가느다란 정치성을 엿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의 일부일처제 성생활이 스테레오타입이라 말씀하셨는데, 남성은 SM 욕구를 노동자를 통해 해소할 있지 않은지?

임옥희 : 당연합니다. 정보를 구할 공간이 인터넷에 굉장히 많다고 들었습니다. 남성이 여성들에 비해서 SM을 경험할 기회가 많은 것 같아요. 비유적으로 얘기하자면, 군대 문화도 SM이잖아요. 치과에 가는 것도 SM이에요. 일방적으로 드러누워서 진료를 받을 수 밖에 없으니까요. 요즘 들어 유행하는 타투 역시 SM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갑을관계의 SM을 연출하며 살고 있죠. (비유적으로 얘기하자면) 학교, 군대, 교회, 가정 할 것 없이. 불평등한 권력 관계는 현실에 만연되어 있지만 그것을 특별히 연출하고 예술적으로 만드는 BDSM은 오히려 차단하는 모순적 행태가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차단한다고 해서 과연 그것이 덮어질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오히려 넘쳐 흘러와 사회에 스며들 수도 있죠.

 

관객 6 : 에스엠이 사회적 계급과도 연결되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50평짜리 거실에서 부유한 백인들이 모여 향유하는 게임 같았습니다. SM이 먹고 살기 바쁜 사람에게는 사치이지 않나 싶습니다. 계급과 섹슈얼리티는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지?

임옥희 : 그것은 오래 전부터 많이 얘기된 주제입니다. 노동자들은 빨리 욕망을 해소하고 그 다음날 노동 현장으로 복귀하라고 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섹슈얼리티 억압에 대한 이유 중 하나이지 않나 하는 맑시즘적 어프로치가 아직도 유효한 것 같습니다. 한 편으로는, 가난한 사람들도 넥타이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SM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여유 있는 사람들이나 즐긴다는 시선을 넘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쾌락을 즐길 수 있는 사용 설명서로써 BDSM을 연구해 봐도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이같은 주제로 수없이 고민했을 분들이 이 강연을 찾아와 주실 거라 믿었고, 제가 여기서 먼저 화두를 던지면 여러분들이 논의를 활발히 펼쳐 주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네요. 여기 계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취재 │ 안진영 루키

 
사진 │ 김하영 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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