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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 INTER-VIEW X TITLE 인터-뷰 X 타이틀

  • [2023] [인터뷰] <빼뻘: 시공을 몽타쥬하다> 김현주 X 조광희 작가
    해파리+박동수 조회수:216 추천수:0
    2023-08-13

    에디터 : <빼뻘: 시공을 몽타쥬하다>는 빼뻘이라는 동네를 라이다 스캔 후 VR로 전시 기획한 작품입니다. VR을 활용해 전시를 기획하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작가님들의 평소 작업 방식과 연결된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시도인지도 궁금합니다.

    김현주 X 조광희 : 2019년도부터 빼뻘마을에서 삶과 장소에 대한 아카이브 기반의 작업을 지속해 왔습니다. 아카이브 작업 자체에 대한 고민 또한 계속해 왔습니다. 그러던 와중 마을을 아카이브 할 수 있는 프로젝트에 대한 사업 제안을 받게 되었는데요. 빼뻘마을이라는 장소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입체화하여 경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실험을 VR 매체를 통해서 해보고 싶었습니다.

    처음 빼뻘마을에 왔을 때 목격한 것은 사람들이 살던 마을의 일부가 사라져가던 풍경이었습니다. 이후에도 건물들이 일순간 사라지는 모습을 경험하면서 안타까움과 위기감, 일종의 절박감 같은 걸 느꼈습니다. 저희에게 건물에 쓰인 낙서나 스티커, 사람들의 물건들, 장소에 남겨진 모든 흔적은 일종의 메시지입니다. 빼뻘의 건물들은 떠난 사람들과, 주고받았던 호흡과, 사람들의 흔적을 온전히 지키며 버티고 있는 것이라 느껴왔는데요. 건물이 사라지면 장소가 사라지고 변하게 되므로 더 이상 그 장소를 상상할 수 없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가 되는 거죠. 어떤 중요한 메시지가 사라지게 되면서 해독 가능성을 잃게 되는.

    해마다 사라지고 변화되는 마을의 장소,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집중하게 되면서 VR을 활용한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는 사실적 기록이 일종의 가난 포르노처럼 마을을 보여주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관객이 작품을 보는 방식과 태도, 공감할 방법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서 설치 작업과 관객참여형 작업을 같이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3개월간 VR로 마을을 기록하는 동안 계절이 바뀌었고, 촬영된 장소는 동일했지만 각각의 장소가 시간성에 의해 변화되고 어긋남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느끼는 것 그리고 기억하는 것, 인식하는 것에 관한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고민을 통해 지역이라는 것이 총체적으로 연결된 대기, 시간, 수많은 살아있는 것들에 의해 매일 변화되고 있다는 자연스러운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그 어긋남을 강조하고 파편화함으로써 장소 그리고 기억이란 실체가 없는, 기억하려고 하는 주체에 의해 어긋나고 덧붙여진 일종의 몽타주와 같은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에디터 : 앞 질문에서 언급했듯이, 작품은 빼뻘이라는 공간을 라이다 스캔하여 가상의 3D 공간에 구현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는 공간을 기술적으로 가공함으로써 어떤 공백처럼 남을 빼뻘(기지촌)이라는 대문자 역사에 쓰이지 않을 비가시적인 공간 혹은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가시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발전된 기술을 활용하여 비가시화된 역사/장소를 가시화하는 작업 방식은 작가님들의 다른 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요. 이러한 작업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관해 자유롭게 얘기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김현주 X 조광희 : 몫 없는 자들의 몫을 불러내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작품을 만들 때 남의 삶의 이야기를 가시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의 삶과 세계를 예술이라는 장안에 연결하려고 합니다.

     

    에디터 : 2022년에 진행하신 <도시-도심(心)> 전시나 <일시적 개입>에서도 알 수 있듯, 작가님들은 풍경(장소)과 사람을 연결해 보고자 하는 시도를 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풍경, 장소성에 관한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있으실까요?

    김현주 X 조광희 : 우리는 한국전쟁 이후 분단된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70년 분단의 세월과 도시화 계획에 따라 전쟁은 우리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졌고 ‘과거’가 되어버린 듯합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삶의 저편에는 여전히 전쟁을 기억하는 장소들이 남아있고 그 시대의 폭력에 휘말려 산 노인들의 기억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기억을 더듬고 싶었습니다. 노인 세대의 기억을 불러내는 것은 우리 삶의 장소를 다시 보는 일이기도 한데요. 내가 누구인지, 내가 사는 곳이 어디인지와 같은 창작에서 근본적인 질문에서 내 주변의 삶들과 장소들을 연결하고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에디터 : 작가님들은 2019년부터 빼뻘 주민들과 인연을 맺고 다양한 활동을 펼쳐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빼뻘이라는 장소와 어떻게 만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김현주 X 조광희 : 한국전쟁과 관계한 삶과 장소에 대한 일련의 작품들을 진행하면서, 전쟁 이후 전국 각지에 만들어진 기지촌과 그곳에서 일하게 된 여성들의 삶에 대한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직접 만나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빼뻘마을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에디터 : 보통 빼뻘과 같은 기지촌에 관한 작품은 기지촌 여성 노동자들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방식이 많은데요. <빼뻘: 시공을 몽타쥬하다>는 기지촌에 남아 있는 동네 주민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룹니다. 그래서 작품을 보다 보면 더욱더 빼뻘이라는 동네의 장소성에 주목하게 되는데요. 한편으로는 작품을 만드는 작가님들의 입장에서는 기지촌 여성 노동자에 관한 얘기를 다루고 싶다는 고민도 잠시 드셨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이런 고민을 하셨는지, 만약 이런 고민을 하셨다면 그런데도 장소성에 주목하는 방식을 선택하신 이유를 여쭙고 싶습니다.

    김현주 X 조광희 : 작업을 진행한다는 목적을 갖고 의도적으로 여성들을 만나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마을에서 살아가는 주민분들이 자신이 과거에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이름표나 완장을 차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요. 물론 마을에 있다 보면 자연스레 과거 클럽에서 일하셨던 분들을 만나게 되곤 합니다. 기지촌 여성 노동자들을 포함한 다양한 주민들을 만났고 현재도 만나고 있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꼭 저희의 작업에 소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작업보다 그들의 공감과 삶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에디터 : 개인적으로 <빼뻘: 시공을 몽타쥬하다>는 기지촌이라는 상당히 ‘개념적’이고 ‘사고 편향적인’ 기지촌이라는 공간을 다소 편협한 인간의 눈을 최대한 배제하는 라이다 스캔이라는 방식으로 작업함으로써, 그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사고 다발적’이게끔 만든다고 생각하는데요. 작가님들은 작가로서 작품을 만들어 나갈 때 그 작품을 감상할 사람들이 나의 작품을 다양한 방식으로 바라봐 주었으면 좋겠다는 고민을 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김현주 X 조광희 : 물론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장소, 세계 안에 있는 그 무엇도 매 순간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인식 또한 무언가를 바라보고 사색할 때, 고정된 시각이나 ‘안다’라는 확신보다는 ‘모른다’라는 태도가 열린 질문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린 질문은 대상과의 대화로 연결되고 대화를 통해 대상에 대한 인식을 확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술가에게 대화란 창작적 사유라고 생각합니다.

     

    에디터 : 혹시 지금 작업하고 계신 작품이 있는지, 어떤 방식의 작품을 기획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김현주 X 조광희 : 올해 작업하고 있는 것은 <기억 항해>라는 프로젝트형 작업입니다. 약 20년 전 문을 닫은 빼뻘마을의 송산 반점이라는 오래된 장소가 있는데요. 이곳은 일제 강점기에 돈을 벌기 위해 이주해 온 1세대 중국 이주민이라고 볼 수 있는 가족의 역사가 담긴 곳입니다. 이 장소를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예술공간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있는데요. 이와 함께 복합적인 활동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또 이 공간을 기점으로 관객들이 마을의 맵핑된 장소들을 투어하듯 걸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마을을 감각하고 사색하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헤드셋을 활용하여 걸으며 마을을 다양한 방식으로 상상하고 감각하는 다원 예술 형태의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현재 주민들을 인터뷰하고 이후에는 주민들이 대본화된 멘트를 낭독하고 녹음하는 작업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글. 해파리+박동수. 네마프X해파리 에디터.

     

  • [2022] vol.7 [리뷰] 대안영상예술이론학교 7, 8강
    NeMaf 조회수:422 추천수:1
    2022-09-22

     

     

     7강, "파이프와 껍질: 행성적인 것의 형상화"

     

    강의 정보
    윤원화(시각문화 연구자, 평론가)
    08월 25일 목요일 1부

     

    강의 리뷰

    본 강연은 ‘지구를 어떻게 재현할 수 있을까’와 ‘우리가 있는 지금 여기를 어떻게 그려볼 수 있을까?’라는 이 질문들 사이에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먼저, ‘지구의 근대적 재현’에는 행성을 우리 눈앞에 세우는 것으로, ‘규모의 왜곡’과 ‘정보의 과포화’, ‘관찰자와 관찰 대상의 분리’가 있다. 이것들은 지도의 개념을 시간으로 확장했을 때 뚜렷하게 나타기에 우리는 자연이 변화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지구 자체의 재현은 매우 작거나 혹은 너무 방대한 데이터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식별할 수 없게 만들기에 많은 데이터를 습득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지만 지구온난화를 우리가 체감하기도 전에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구에 대한 광범위한 데이터 덕분이다.

    인류세에서 지구는 자연과 사회로 최소한 두 겹으로 나눠져 있다. 자연은 필연, 바꿀 수 없는 것이지만 사회는 바꿀 수 있는 것이고 현재에서 미래로 끝없이 열려있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 활동이 자연에 영향을 준다’와 ‘자연이 인간이 그어놓은 선을 자꾸만 넘는다’로 자연과 사회의 경계가 교란될 때를 포착할 수 있다. 후자의 입장은 자연은 인간에게 차단되고 통제되어져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자연을 다시 어떻게 정복할 것 인가(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자연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라는 기후위기에 대한 대부분의 해법들은 인간 중심의 근대적인 해법이자 강한 사회과학적 해법이라 본 강연자는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행성적인 것의 형상화’ 즉, ‘우리를 포함하여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브라이도티가 말했듯, ‘형상화(figuration)’는 특정한 상황 속에 체화되고 내장된 위치들의 유물론적 지도 제작술이다. 행위가 발생할 수 있는 배치의 식별과 운동과 변신 가능성을 모색하고 인물과 배경의 유동적 전환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브라이도티의 형상화는 제대로 주체화되지 못한 사람들이 스스로 주체화할 수 있는 대체제로 사용되었다. 외부자적 관점,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파이프와 껍질’은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여러 가지 조합으로 형상화 할 수 있고 ‘힘을 전달하는 물질과 기호적 구성’과 ‘형태와 기능의 상보적 변형 가능성’, ‘작용의 형상화’를 특징으로 한다. 우리는 어떠한 영역에 귀속되어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귀속된 존재로서의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다른 것들과 조정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물음과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외에도 힘을 가지고 있는 것들을 어떻게 형상화 할 수 있을까’의 접근은 캐릭터를 구축하는 시나리오가 되기에, 파이프와 껍질은 구축의 도구가 될 수 있다. ‘형상화를 한다는 것’은 이미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며 반응을 개방 할 수 있는 틀이라는 말을 끝으로 강의를 마친다.

     

    작성자: 아카데미 알트루키 강하은

     

     

     

    8강, "“달을  공으로  착각하기”:  러시아우주론과  (기술)유토피아주의"

     

    강의 정보
    김수환(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학과 교수)
    08월 25일 목요일 2부

     

    강의 리뷰

    러시아  우주론과  (기술)유토피아주의를  말하려면  ‘혁명’에  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발터  벤야민이  언급했던  혁명은  Innervation.  즉  집단  신경  감응이  내재한다.  1929년,  벤야민이  「초현실주의」에서  집단적  신경감응에  관해  이야기한다.  벤야민이  러시아  우주론에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는  없지만,  어떻게  Innervation이 벤야민의  텍스트에  들어갔는지는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앞서  강의에서  살펴보았듯,  1926년  시작된  모스크바  여행이  그에게  큰  미디어로  작용했으리라  추측해본다.  또  다른  이유는  그가  귀국한  후  바로  쓴  「일방통행로」에서  우주란  단어가  등장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러시아  우주론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러시아  우주론에  있어  두  가지  핵심은  인류의  불멸과  우주개발이었다.  인류의  불멸이란  모두를  위한  것, 즉  이미  죽었던  선조들이  부활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부활  대상은  아담과  이브를  비롯한  모든  인류를  말한다.  인류라고  말하고  있듯이  동물  or  생명체  부활에  관한  함의는  담기지  않았다.  우주개발은  인류의 불멸에서  확장된  자연스러운  논지이다.  과거의  인류를  부활시키게  되면  지구가  좁아지니  인류를  다른  행성으로  이주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  바깥으로  나온  인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신체가  우주에서 살  수  있도록  개조가  되어야  하는가.  이에  더해  뮤지올로지까지  생각해본다면  러시아  우주론에  관해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발터  벤야민의  유토피아에  관해  살펴보자.  발터  벤야민은  제2기술에서  제1기술로  확장하는  일련의 경로를  만든다.  그는  제2기술이  가능케  한  생산력에  적응해야  그  도구에  노예화가  되는  것이  아닌  그  도구를  통해  해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는  인간이  제2의  기술을  섭렵하게  되면  유희  공간이  확장되며 자신의  요구를  내세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삶의  문제들이  요구되며  그들은  유희  공간이  확장되는  것을  보게  된다.  더  나아가  그들은  유토피아적  의지를  분출한다.  제1기술과  제2기술이  있듯이  제1자연과  제2자연도  있다.  제1의  자연은  특히  인간의  신체이며  제2자연은  상당히  실현된  것을  ♘한다.  둘은  각각의  유토피아를  갖고  있다.  인류의  발전이  진척될수록  제2자연에  의해서  제1의  자연이  후퇴하지만,  이것은  일시적 후퇴이다.  제2의  자연의  유토피아가  해결되면  제1자연이  전면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이로써  모든  미생물의  놀이터를  제공하게  된다.  「일방통행로」에서  벤야민은  집단적,  전  지구적  규모,  기술과  신체(자연),  피시스에  관해  말한다.  이러한  낱말의  시작점과  이로부터  이어지는  진행  경로는  앞서  말한  논의들과  유사하다고
    본다.

    우주를  꿈꾸고  우주를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지구와  함께하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을까.  강의에서는  레자  네가레스타니의  「다중세계의  우주론적  정치학에  대한  단상」을  제시한다.  상승의  정치학이  아닌  더 깊이  내려가는  하강의  정치학을  말한다.  더해서  강의에서  지구  생활자,  임계  영역에  관해  언급한다.  임계  영역에  산다는  것은  조금  더  지속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이는  거주적합성  안에서  함께하는  삶,  낯선  것들과의  친밀성을  지향한다.  특히  위의  논의는  숙주-기생자의  연결이  아니다.  이  연결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기생자가  어떻게  보일  것인지  문제화될  수  있다.  앞  문단을  비판하고자  하는  자들은  숙주-기생자  관계가  아닌  공생하는  관계를  모델로  삼는다.  공생이란  서로가  돌봄/관여/애착하는  관계를  말한다.  하지만  이 방법론에  치우치는  것이  아닌  오늘날의  상황에  맞춰서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과거를  부활시키고  과거  자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담대한  유토피아로  다시  돌아가서  순간의  기억을  다시  검토하며  꼼꼼하게  살펴보다  보면  무언의  시작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성자: 아카데미  알트루키  구혜린

     

     

  • [2022] vol.7 [리뷰] 대안영상예술이론학교 5, 6강
    NeMaf 조회수:429 추천수:1
    2022-09-22

     

    5강, "근대 서구에서 인조 식물 발달의 역사"

    강의 정보
    윤경희(비교문학 연구자)
    8월 24일 수요일 1부

     

    강의 리뷰

    올해  네마프의  주제인  {자연이  미디어다:작-용}에  관해  생각해  보자.  이  주제는  꽃이라는  식물을 통해  확장될  수  있다.  앞서  말한  식물은  인간의  손에  만들어진  인조  식물이다.  인조  식물은  자연이라는  실재를  인공물로  모방하는  것이다.  식물  표본은  육안으로  관찰한  식물을  연구하는  것이라면  실재를  모방하는  인조  식물은  조화를  만들어  내는  기술자에  의해  연구되는  것이다.  1738년  프랑스  출신의  므슈  스갱은  화학/식물학 연구자로서  자연을  바라보는  18C  시대인이다.  므슈  스갱은  도구를  스스로  만들었으며  가짜  꽃을  통해  조화를  표하고자  하였다.  조화란  르네상스  시대의  완벽한  상태와  비례가  아니다.  탄생과  죽음,  병,  곰팡이가  피어나는  생명현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진실을  모방해야만  가장  완벽한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  이때의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관습적인  시간이  아니라  생의  시간,  그  자체를  말한다.

    조화는  왕족을  위해서  쓰이기도  하였다.  특히  마리-앙투아네트의  조화공인  T.J.  방젤에  의해  인조  식물이 단순히  학술적,  미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에도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790년  국민의회에  [인조  식물  공장  건립  허가  요청  보고서]를  제출한다.  이  공장은  파리  노동자  4,000명을  고용할  수  있는 대규모  인조  식물  공장이다.  방젤의  기획은  다양한  전문가들에  의해  지지를  얻었다.  의사이자  식물학자인 앙투안  드  쥐시외는  인조  식물  공장이  형태와  성질을  고정할 수  없는  식물들에  애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제인  생-탕드레-데-자르는  편견과  학대로  인해  인민  계층  여성의  지위가  취약해졌고  이로  인해  곤경에  처한  여성  노동자를  구제할  수  있는  사업이라고  지지하였다.

    19C  프랑스는  기획,  욕망을  실현하려는  인조  식물  모형  제작자와  가내수공업자들의  전성기였다. 모형  제작자인  앙드레-피에르  팽송은  밀랍  버섯을  500종  제작하였다.  발견하기가  희귀한  버섯들을 인공적으로  제작하며  그는  욕망을  실천해나간다.  육안으로  확인한  후  압화로  만드는  것이  아닌  모형으로  제작하고자  했던 로비야르  다르장텔에게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그는  아시아,  아메리카  항해  경험을  바탕으로  오랜  여행에도  변형,  변색,  부패하지  않는  원형  그대로의  이국적  꽃과  과일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자신이  본  아름다운  것들을  유럽인들에게  모형을  통해  보여준다.  그  모형은  실물에  가까운  코코넛,  캐슈넛  등  이국적인  과일이었다.

    전성기였던  프랑스  파리에서는  부티크  거리가  즐비했다.  그곳에서  가내수공업자들이  활발하게  여성복을  만들기  시작한다.  인조  식물은  상품화되고  제품은  효율적으로  생산이  되어간다.  이  생산방식에는  어두운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어떻게  색깔을  지속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화학이었다.  화학제품에  의해  환경은  취약해졌고  그  환경  속에  여성  노동자의  손은  각종  화학물질(비소,  납,  아날린,  락스)에  중독되고  피부병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겉보기에는  화려하고  조화가  도시  여성들의  외양을  아름답게  꾸며낼지라도  그  아래에는  어두운  측면이  내재함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조화는  다양하게  만들어져  인간  앞에  놓인다.  지점토로  만들어진  조화는  프랑스  농업  학교에서 쓰이기도  했으며  유리로  만든  조화는  박물관(하버드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되기도  한다.  유리를  활용해  조화를  만든  자는  블라슈카  부자다.  블라슈카  부자는  썩은  과일까지도  직접  만들어 전시해  생의  시간을  보여준다.  또한  박물관에는  블라슈카  부자가  사용했던  도구들이  전시되어있다. 이  도구는  꽃잎들의  형태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던  틀,  망치다.  이  강의는  옛날의  프랑스  인들이  어떻게  인조  식물을  만들었는가가  핵심이다.  꽃이라는  작물은  과학과  결합하게  되면서  인조  식물의  역사로  나아갔다.  노동자들은  손을  통해  여성들의  옷과 모자에  꾸며지는  조화를  만들기도  했고  각자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  인조  식물을  만들기도  했다. 이를  통해  생물학과  자연학이  지식으로서  작용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참고  영화:  <리틀  조,2019>,  <식물  수집가,2022>

    참고  문학:  에밀  졸라,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1883),  박명숙  옮김,  시공사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거꾸로]  (1884),  유진현  옮김,  문학과지성사

     

    작성자: 아카데미  알트루키  구혜린

     

     

     

    6강, "자본의 ‘메타버스(Metaverse)’를 넘어 생태의 ‘플루리버스(Pluriverse)’로
    : 라틴아메리카와 새로운 공동성 디자인하기"

     

    강의 정보
    박정원(경희대학교 비교문학연구소 소장)
    08월 24일 수요일 2부

     

    강의 리뷰

    본 강연에서는 현 시대에 왜 라틴아메리카에서 ‘플루리버스’라는 새로운 단어가 나타났고, 이론과 실천에서 왜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고 있는가를 말하고자 한다.

    ‘메타버스’는 “Meta(초원) + universe(우주)의 합성어”로, ‘가상의 세계’창조이자 테크놀로지의 금전적 실현과 그 결과이다. 한편으로는 이로 인해 돈이 되는 메타버스가 자본에 의해 굴러가고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현실이 강해지면서 물신화 되는 부분이 강화된다. 메타버스는 더욱 길고 두터운 인류세 시대를 초래하고 결과적으로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인간과 세계의 통제라는 근대적 세계관의 연속-심화가 나타난다. 라틴아메리카는 ‘우리는 어떻게 인류세 시대를 짧게 만들어 다음 세대로 넘어갈 수 있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문명적 전환의 요구와 필요성”을 이야기하며 ‘자본의 메타버스’에서 ‘생태의 플루리버스(‘플루리버스’-Plural(다수의) + Universe(우주)로, ‘다수의 우주’ 혹은 ‘다중 우주’)’로 가고자 했다. 그동안 인간중심의 하나의 세계였다면 이제는 많은 세계가 들어갈 수 있는 세계, 근대 세계를 넘어 현실과 이상을 표현하고자 했다. “관계적 존재론”으로 보면 인간을 중심에 놓고 다양성을 논의하는 서구의 다문화주의를 넘어 인간과 인간 외 존재의 위계를 해체하는 급진성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근대의 지배적 사고를 넘어서는 사유로써 ‘플루리버스’는 서구가 주도하는 개방주의, 발전주의라는 목적론을 극복하는 금전적 지속가능성을 모색 할 수 있게 한다.

    플루리버스의 또 다른 의미로는 근대에 의해 억압받고, 주변화된, 잊혀지고 퇴행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존재의 귀환이기도 하다. 선주민, 흑인과 여성의 삶과 지식에 관심을 가지고 기존의 관점을 수용하되, 사회관에서 자연과, 우주관으로 시각을 확장시킨다. 이는 생명과 삶의 복원, 지금까지와는 다른 대인적 가치의 창조이며 과거와 미래가 통화할 수 있는, 탈미래화가 아닌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본 강연자는, 우리는 종종 서구중심적인 사상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실질적 한계가 있고 이를 벗어나 볼 수 있는 방법으로 서구 비판적 시각과 라틴아메리카(비서구적)에서 나오는 이론, 담론, 사상들을 받아들이고 공부할 수 있어야 함과 동시에 서구 모델의 모방, 추종을 넘어 어떻게 새로운 사회 디자인을 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을 끝으로 본 강연을 마친다.

     

    작성자: 아카데미 알트루키 강하은

     

  • [2022] vol.7 [리뷰] 대안영상예술이론학교 3, 4강
    NeMaf 조회수:407 추천수:1
    2022-09-22

     

    3강, “(인공)지능, (블루)브레인,  시냅스  미디어”

     

    강의 정보
    정혜욱(부경대학교 학술연구교수)
    2022년 8월  23일  화요일 1부

     

    강의 리뷰

    본  강의는  지능(intelligence)이  어떻게  인공지능으로  연결되고,  둘의  근친성을  찾을  수 있는지,  둘의  집합  진영을  살펴볼  수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지능의  어원은  inter-(살), legere(읽다), ligare(설립하다)의  합성어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살피는  능력”을  지능이라 정의한다.  IQ와  지능은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  1822-1911)의  우생학을  창시하면서  연관지어졌다.  이  우생학은  사회적으로  깊은  영향을  끼쳤는데,  대표적으로는  “우성형질의  재생산”을 위해  세계  2차대전  당시  나치는  ‘레벤스보른(Lebensborn,  생명의  탄생)’을  자행했다.  다음으로는 “부적격자의  학살”이  이뤄졌는데,  나치는  ‘홀로코스트(Holocaust,  1933-1945)’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1905년  비네-시동  척도(Binet-Simon Scale)는  최초의  지능  검사를  도입했고,   루이스  터먼(Lewis  Terman1877-1956)은  지능테스트를  광범위하게  확신시켜  “미국의  능력주의  문화”를  공고히  하는데  일조했다.  이런  역사적  아픔을  통해  철학에서  지능의  지위를  비판하고자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학자로는  앙리  베르그송,  조르주  캉길램,  미셸  푸코  등이  있다.

    한편,   뇌가   지닌   신경계의   구조는   환경,   경험,   신체상태에   따라   변화하는   “가소성(plasticity)"이  있음이  정신/마음을  다루는  뇌과학  분야에서  최근  20-30년간  활발히  연구되었다. 인간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인공지능은  발전하고  있으며  인공지능의  발전은  뇌가소성과  굉장히  유사한  양상을  띄고  있다.  이전까지  많은  비판  받은  유전학에  입각한  지능을  폐기하고  가소성과,  가소성과  유사한  양상을  띤  인공지능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인공지능  또한  정보화사회의  촉매인  동시에  감시와  통제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후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날  것을  암시한  레이  커즈와일은  “특이점”이  도래할  것이라, 기술이 인간을  초월하는  순간이  도래할  것이라  예측하고  있다.  따라서  강의자는  인공지능을  작동시키고  만드는  실리콘  밸리의  소수의  과학자들에게  헤게모니를  쥐어주고  과학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소극적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닌, “연결”되려고  노력해야  함을  주지하며  강의를  마쳤다.

     

    작성자  :  아카데미  알트루키  최은총

     

     

     

    4강, "포스트인간중심주의ㅡ기술미디어-신체미디어"

     

    강의 정보
    심효원 (연세대학교 매체와예술연구소 학술연구교수
    2022년 8월 23일 (화) 2부

     

    강의 리뷰

    강의  도입부에서는  양성  잔상을  이용한  장난감인  소마트로프와  그와  동일한  원리에  기반한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이야기하며  인간  감각의  불완전성에  기대고  있는  인간중심주의적  매체에  대한화두를  던졌다.  인류세  시대에  이르러  기존의  인간중심주의로부터의  전환을  모색하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작용하는 티모시 머튼(Timothy Morton)의 초과객체(Hyperobjects)에 대한 서술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인류세와  관련된  논의들과  맞물려  최근  다수  등장한  포스트인간중심주의를  다룬  예술적  시도들  중  공통적으로  유형화되는  부분들을  포스트식민주의적  입장,  생태주의적  입장, 민족지학적  입장,  신비주의적  입장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중  포스트인간중심주의 관점과  관련하여  기술미디어를  전면에  내세우는  경우를  또  다시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  사례  중심으로  설명했다.  그중  첫번째  경우는  기술  미디어를  경유하는  데이터  시각화로  초과객체를  가시화하려는  사례들로,  데이터들이  기술  미디어를  경유해  감각과  인식이  용이한  디지털  합성  이미지로 시각화되♘을 때 그것이 주는 즉각적인 효과를 기대한다. T. J. 디모스(T. J. Demos)는 디지털 합성은  어디까지나  취사선택을  거친  구성된  이미지라는  점을  지적하며  디지털  합성이  해당  데이터와  상황을  둘러싼  맥락을  축소하거나  그  뒤의  특정  의도로  맥락화한  주체의  존재까지  지워버릴 수  있다는  비판을  제기한  바  있다.  또  다른  경우는  기술  미디어의  특성  자체를  전면화하는  경우로,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의 ‘작동적 이미지’와  이에 대한  트레버 페글렌(Trevor Paglen)의 비판, 그리고  페글렌의  논의를  반영하여  마크  한센(Mark  B.N.  Hansen)이  제시한  ‘작동적  맹목’  개념을 중심으로 설명하였다.  우리 자신이 인간으로서  지닌 정신적, 생리학적 한계를 인식하는  동시에 기존의  습관적  지각과 명징성을  추구하는 태도를  경계하며  ‘포스트인간중심주의’적인 새로운 접근의 동력을 만들어야 할 시점이라는 방향성을 제시하며 4강을 마무리했다.

     

    작성자: 아카데미 알트루키 오혜주

  • [2022] vol.7 [리뷰] 대안영상예술이론학교 1, 2강
    NeMaf 조회수:444 추천수:1
    2022-09-22

     

    1강, “인류세를  지나는  영화  서사의  가능성”

     

    강의  정보
    유지수(용인대 영화영상학교 교수)
    8월  22일  월요일  1부


    강의 리뷰

    1강은  홀로세에서  인류세로의  전환의  시대에서  인류세에  대한  아이러니와  딜레마를  영
    화라는  매체가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인류세(Anthropocene)는  인류(Anthropos)와  세(eoch/-cenr)의  합성어로  ‘인류세’는  주로  부정적인  개념으로  제시된다.  이  지질학적  개념이  “왜  영화와  연결되는가?”가  이  강의의  중심내용으로  제시되었다.  인류세는  환경  오염,  지구  온난화/지후  변화,  해수면  상승,  물부족,  자원  고갈, 생물  변화  등  “지구의  환경이  더  이상  ‘자연’스러울  수  없는  시대”이다.  다른  말로  위와  같은 문제로  인해  인간종이  “지구  시스템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인류세가  가리키는  방향은  무엇인가?  바로  “모든  것의  끝,  파국/절멸”  ,”상상력  저  너머의  개념  혹은 공간”인  것이다.  역사학자  디페치  차크라바르티(Dipech  Chakrabarby)에  따르면  “이제  인간종은 다른  종도  살  수  없는  행성을  만드는  기후변화를  초래하는  작인을  인간종에게  건네주었다.”라고 말할  만큼  결국  인간을  위한  문명의  개발이  인간을  파괴한  딜레마를  제시했다.  더하여  환경역사학자  J.R. Mcneil & Peter Engelke는  “인류세가  가진  위험은  현재  상황을  급변시키는  전복이  아닌,  계속해서  진행하는  연속성과  전복을  막는  지지력에  있다.”고  짚기도  하였다.

    매체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화학연료와  뗄  수  없는  사이이다.  또한  영화는  인간  중심의 서사  구성과  물리적인  세팅을  포함한  영화  제작  조건을  통해  철저히  환경을  조작하고  통제한다. 더하여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함께  화석연료에  기초한  자원  의존성과  제작  환경의  조작  통제는 더욱  심화하고  있다.  따라서  인류세와  영화는  함께  사유될  수  밖에  없을  것이며,  우리는  영화를 "시스템”으로  생각해야  한다.  영화,  미디어  학자인  제니퍼  페이(Jennifer  Fay)는  인류세를  영화를 통해  가늠하며,  영화를  인류세의  속성인  아이러니와  딜레마를  배태한  현상이자  매체로서  바라본다.  저자는  버스터키튼(Buster  Keaton)의  영화,지아  장커(Jia  Zhangke)dml  <still  Life>(2006)를 예시로  들며  ‘홀로세’의  말로와  ‘인류세’의  도래를  영화로  제시한다.  그럼으로써  인류세를  지나는 인간이  영화를  어떻게  바라봐야할  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강의를  마친다.

     

    작성자  :  아카데미  알트루키  최은총

     

     

     

                                                

    2강, "새와 원숭이, 그리고 인간: 냉전기 영화 속 ‘동물’ 재현"
     

     

    강의  정보
    남상욱 (인천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
    2022년 8월 22일 (월) 2부

     

    강의 리뷰

    1강에서 다룬 인류세 담론이 주로 동시대적이고 미래지향적이♘다면, 2강 ‘새와 원숭이, 그리고 인간:  냉전기  영화  속  ‘동물’  재현’은  과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편된  ‘인간’과  동물의  관계,  그리고  냉전기  영화  속에서  동물이  재현되는  방식에  관하여  영화  <새>(1963)와  <혹성탈출>(1968)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서구  철학자들은  동물과의  대비를  통해  인간을  정의하고  구성해  왔다.  ‘인간’에  대한  정의는  동물성의  발견과  추출에서  시작하여  동물에  대한  인간의 우위를  전제로  해  왔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시기를  지나며  인류가  겪고  목격한  ‘인간의  동물화’의 경험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우위를 의심케 했다.

    따라서 냉전기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공격성과 적대감이 극에 달하며 새로운 인간성에 대한 모색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영화  속의  ‘동물’  재현  속에는  동물의  인간에  대한  공격성이  새로운  스펙터클로  등장하였으며, 영화  <새>, <죠스>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새>의  자연관은  자연을  상호부조의  장으로  여기는  크로포트킨적,  다시  말해  아나키즘적  자연관을  회피하고  자연을  자기보존을  위한  투쟁의  장으로  바라보는  홉스적  자연관을  확대하고  있다.  미국의  영화  <새>의  재현이 보여  주는  자연의  공격성과  집단성에  대한  과장은  냉전  상황에  대한  미국인의  인식  및  감수성과도  맞물려  있으며,  자유로운  여성을  상징하는  멜라니라는  여성  인물을  등장시키고  여성이  자연의 공격성과  집단성에  취약함을  강조함으로써  가부장제적  가치관에  여성을  가두려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로도 이해할 수 있다.

    한편 <혹성탈출>에 등장하는 원숭이  표상은 인간과 인간의  대립을  인간과  동물의  대립으로  환치하거나,  원숭이  표상을  인간의  공격성을  외부화하는  존재로서  확대되♘다.  동물의  공격성의  초점화는  인간의  공격성을  합리화하거나,  그로부터  거리를  두는  인간성의  모색으로  이어졌다.  인간을 동물과 동물의 공격성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시도  속에 새롭게 형성된 ‘인간성’은 전쟁 억제의 논리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인간성’은  어디까지나  동물(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위라는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 하에 존재한다.

    인간과  동물이  지닌  각각의  공격성과  상호취약성,  트러블과  함께  한다는  것의  어려움,  그리고  인
    간 형상에 대한 긴급한 재구성이 인간 내 인종주의 및 능력주의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지를 남은 질문과 과제로 제시하며 2강을 마쳤다.

     

    작성자:  아카데미 알트루키 오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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