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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NeMaf 2024 디엔 볼쉐이 림 : 일인칭 복수 Artist Talk
조한나 조회수:1032 121.171.194.214
2024-08-06 00:32:41

«일인칭 복수» Artist Talk

일시: 24.08.3(토)

모더레이터: 김장연호 집행위원장님

참석: 디엔 볼쉐이 림 감독님

 

 

김장연호 집행위원장님

첫 인사를 드리긴 했지만, 다시 한번 인사를 드릴까 합니다. 저는 서울국제대한영상예술페스티벌 집행위원장이자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김장연호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품 3편을 연출한 디엔 볼쉐이 림 감독님께 나와주셨고요. 그리고 통역 진행을 도와줄 선생님까지 이렇게 모셨습니다. 작품이 한국에서 첫 상영은 아닌 거죠?

왜냐하면, 제가 자료를 찾아봤을 때 한국에는 상영한 적이 없었고 이렇게 유명한 작품이 샌프란시스코 필름 페스티벌에서 다큐멘터리 최우수상을 받고 선댄스 영화제에서도 되게 주목 받은 작업이고 미국의 전역의 방송 된 그런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2000년도에 이 작업이 방영이 됐고 지금 24년이잖아요. 24년 동안 1번도 상영되지 않았었던 거예요. 그래서 이게 좀 심각하다라는 생각을 했었고 사실 이 서울국제대한영상예술 페스티벌이 2013년도에 ‘차정희를 찾아서’라고 하는 두 번째 입양 시리즈의 작업을 상영을 했었습니다.

그때 이제 인연이 돼서 저는 디엔 볼쉐이 림 감독님을 주목을 하고 있었고 계속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 부분이 사실 쉽게 제가 다룰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어요. 여성이나, 젠더나 소수자에 관한 부분들을 제가 되게 오랫동안 기획을 해왔지만 제가 이거를 쉽게 관객한테 소개를 하기에는 제가 공부가 너무 부족했고 공부를 해야 될 게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쉽게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가 작년에 그래도 제가 리서치를 했겠죠. 그런데 작년이 입양 70주년이었죠. 한국 국제입양 70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너무나 행사나 프로그램이나 텔레비전의 방송이나 이런 것들이 아예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 너무 심각하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해외에 국제 입양 간 분들이 25만 명 정도로 이 비슷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오늘 이렇게 디엔 볼쉐이 림 감독님 모시고 자리를 마련해서 개인적으로도 감회가 새롭고 그렇습니다. 사실 이 작업을 하기 전에 디엔 볼쉐이 림 감독님은 되게 많은 작품의 프로듀서로 일을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좀 소개를 드리고 싶은 작업은 A.K.A Don Bonus라고 하는 에이미상을 받은 작업인데 그 작업에서 총괄프로듀서로 일을 하셨어요. 그러고 난 다음에 이 작업을 첫 작업으로 선택을 하신 건데 어떻게 보면 그 계기가 되셨을 것 같아요. 사실 자기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이렇게 다큐멘터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라는 거 이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거잖아요.

그래서 감독님께서 보시면서도 아까 너무 떨린다 너무 극장에서 오래간만에 보기 때문에 그 정도로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건데 그런 계기를 또 먼저 좀 여쭤보고 싶습니다.

 

 

디엔 볼쉐이 림 감독님

처음에 이 영화가 2000년에 개봉 되었을때, 한국의 방송국에서도 상영 제안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저의 한국 가족들은 이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공유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가족 한국 가족들의 의견을 존중해서 상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일단 제가 이 영화를 어떻게 제작하게 되었느냐라고 좀 말씀을 드리면, 그 당시 저는 미국의 아시아계 미국인미디어센터(Center for Asian Amerian Media)라는 조직에서 근무를 했었는데요. 해당 조직은 그 아시아계 미국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영화를 지원하고 홍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 센터 같은 경우에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만든 영화에 대한 자금을 지원하고 배포를 도와주셨습니다.

또한 1990년대 말에 기술의 발전이 생기면서 hi8 카메라라는 것이 대중적으로 보급이 되기 시작했죠. 그래서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는 작은 카메라로 영화를 찍을 수 있었고요. 카메라 자체에 음성을 바로 입력을 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훌륭한 퀄리티를 가지고 있는 카메라였어요. 그리고 마이크 인풋 같은 경우에는 총명한 사람들이 XLR 케이블을 꼽을 수 있는 컨버터를 발명 해 카메라와 마이크를 동시에 쓸 수 있었습니다. 결국 조직에서는 이러한 카메라를 가지고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이야기를 창조해내고 담을 수 있는 것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카메라의 사용 덕분에 저희 조직 센터에서 바로 A.K.A Don Bonus 라는 영화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해당 영화는 18세에 해당되는 캄보디아 고등학생의 이야기이고요. 고등학생때 겪는 어려움을 내용으로 담았습니다. 이 영화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초청을 받고 에미상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A.K.A Don Bonus에서 총괄 프로듀서로 일하면서 사람들에게 저의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프로젝트를 하며 영감을 받게 되었구요. Hi8 카메라가 그것에 대해 실험 해 보고 제 사적인 이야기를 촬영 할 수 있는 기회를 줬었습니다. 사실 이 영화에 나오는 오빠, 언니,아버지하고의 대화 장면 같은 경우에도 제가 hi8 카메라를 가지고 찍은 거구요. 그렇기 때문에 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제가 저만의 이야기 , 문화 서술적인 이야기까지도 진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저희 아버지 같은 경우에도 홈무비를 만드셔서 그 찍은 영화 내용들이 좀 조금 나오는 게 보이실 거예요. 저희 아버지도 열성적인 영화 제작자였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8mm 필름에 대해 배웠습니다. 아버지는 8mm 필름 카메라에서 VH 카메라로 넘어오셔서 촬영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로 hi8카메라가 시중에 나오게 되면서 저나 아버지도 hi8 카메라로 촬영을 하기 시작 했고 서로를 촬영하기도 했습니다. 서로 이러한 영화 촬영을 통한 교류, 상호작용이 있었습니다. 너무 답이 길었죠. 죄송합니다.

 

김장연호 집행위원장님

Q&A는 아티스트 토크이기도 하지만 여기 관객분들과의 대화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가 계속 질문을 드리기도 할 건데 혹시 작업에 대한 거나 디엔 볼쉐이 림 감독님에 관한 질문이 있으면 언제든지 질문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Question

일단 제가 4년 전에 컴퓨터상으로 이 작품을 봤었는데 오늘 4년이 지난 다음에 큰 화면을 통해서 보니 더 감동이 크네요.일단 그에 대해서 감사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감독님이 영화에서 쓰신 홈 무비 형식인데요. 감독님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다큐멘터리, 에세이 형식, 더 나아가 시네마로서의 장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에 대해서 얘기를 좀 하고 싶습니다. 감독님의 영화는 개인적이고 친밀한 이야기, 심지어 친근한 기억들을 관객들에게 가져오는 것 같아요. 지난 4년동안 한국 입양에 관련된 관심이 많아지게 되면서, 보셨을지는 모르겠지만 그와 관련된 영화 ‘Return to Seoul’과 같은 작품들이 탄생했습니다. 그래서 감독님이 생각하시는 다큐멘터리의 힘, 또는 에세이 영화의 형식적인 부분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Answer (Deann Borshay Liem)

컴퓨터 대신 이렇게 큰 화면으로 다시 보시게 되셔서 굉장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어렸을 적 기억중에는 아버지가 카메라를 항상 들고 다니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자연스럽게 8mm 필름 작품을 어떻게 편집하는고 프로젝터를 다루는지 배웠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항상 작품을 만들고 제목을 붙이면, 제가 옆에서 프로젝터를 돌리며 온 가족이 함께 모여 같이 찍었던 영화를 봤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정말 많은 작품을 찍으셨고, 저는 아직도 그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 아버지의 영화를 다시 돌아보았을때, 아버지가 영화들을 구성하는 방법에 대해서 어떠한 끌리는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 있었던 상황들인데 아버지가 이것을 어떻게 구성 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이미지로 재생산되는 그런 게 있다는 거죠.

그래서 예를 들면 아버지는 이 모든 내용들을 이상적인 미국 백인들의 핵가족 모습을 비추어 보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굉장히 눈여겨볼 수 있었구요. 동시에 어떤 느낌이 있었냐면 ’저의 인종적인 차이는 무력화되었다. 그리고 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사라졌다‘ 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시각적으로는 제가 동양인이기 때문에 분명한 차이가 보이지만 그 한국인이라는 것은 이 영화를 통해서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봤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에세이 형식의 창작에 굉장히 관심이 갔었습니다. 저의 스토리텔링에서 통제력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에세이 형식의 작품이 저에게 굉장히 중요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입양아로서, 저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주도성이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인으로 성장하면서 저는 제가 사랑했던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한국인이 될 수 있었던 기회도 잃었고요. 입양 문서들, 양부모님들이 해주는 이야기들, 아버지가 찍은 영화들은 특정한 정체성을 형성했어요. 그래서 저는 제 정체성을 가지고 제 내러티브를 재구성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은 우리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다큐멘터리라는 것 자체가 사실 그 역사는 서양에 두고 있습니다. 서양의 인류학에 담겨져 있기 때문에 서양의 학자들이 어떤 지역에 가서 거기를 찍고 그 내용을 가져다가 마음대로 구성을 합니다. 사실 찍힌 사람들이나 그곳의 공동체에 대해서는 자신의 이야기가 어떻게 읽혀지는 데 대해선 전혀 통제나 주체성을 가질 수가 없는 거죠. 그렇지만 제 창작에 있어서 제 개인적인 스토리텔링을 제 관점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나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Question

일단 이렇게 아름다운 영화를 감상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드리구요. 저도 이 영화에 굉장히 감동을 받았습니다. 정말 눈물이 흐르기까지 했는데요. 제가 궁금한 것은 실제 이 영화 24년 전에 제작이 되었는데 영화를 제작하고 난 후에 어떤 변화 또는 영향이 있었는지, 더 행복감을 가지시게 되는지, 아니면 관계 차원에 있어서 변화가 있었는지 이런 궁금증이 있습니다.

 

Answer (Deann Borshay Liem)

저는 영화가 다 마무리되고 나서 이 영화를 저희 가족과 함께 볼 수 있었습니다. 중간에 절대 보여주지 않았는데요. 왜냐하면, 제가 정말 필요로 한 것들이 다 들어간 상태에서 보여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화가 완성된 다음에 미국 가족들과 함께 같이 봤는데요. 정말 놀랍고 좋은 대화를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입양이라는 것이 분명히 우리 가족에게 큰 영향을 끼쳤지만 그전에는 절대로 서로 이 내용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었어요. 하지만 제가 저희 미국 부모님과 함께 한국을 방문하면서 굉장히 중요한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입양의 과정에서 상실감이 포함된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입양아로서 저희 미국 부모님께서도 그것을 인지하시고 제가 느끼는 슬픔을 공유한다 사실이 중요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대화한 이후로 부모님과 저의 관계에서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고 많은 것들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제 한국인 어머니께서도 미국에 와서 바베큐를 즐기시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또 제 한국인 조카가 아까 본 영화에서는 9살이었는데 미국 버클리에서 공부를 하면서 6년 동안 저와 같이 살았어요. 조카는 지금은 자녀 3명과 함께 몇마일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에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저의 생부모의 형제 오빠나 언니들, 여동생과는 언어적인 장벽에 있어서 소통이 원활하지는 않지만 저희 조카가 중간에서 소통자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Question

제 이름은 조셉이고요. 저도 미디어 공부를 하고 있고, 이렇게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어서 굉장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영화 마지막에 본인의 가족을 보여주시면서 영화를 끝내신 부분에 대해서 인데요. 아들과, 남편을 보여주셨는데 가족 중에서 아드님이 자라면서 본인에 정체성에 대해 어떻게 형성이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Answer (Deann Borshay Liem)

영화를 보시면서 어떻게 느끼셨는지 직접 의견을 좀 묻고 싶은데요, 어쨌든 아들은 원래 지금 한국에 살고 있구요. 몇 년 동안 지금 한국에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국에 방문 해 있는 동안 내내 저와 함께 있었는데, 오늘만 없어요. 아들이 직접 와서 설명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웃음) 어쨌든 저희 아들도 본인이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고 이 역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한국, 아시아계 미국인, 입양에 대한 내용을 계속해서 다루는 영화를 만들 것입니다. 네 번째 작품도 입양에 관련된 영화를 만들고 있는데요. 아마 제작자로서 한국 입양에 대해서 영화를 만든 기록을 세우게 될 것 같네요. 이번 네 번째 영화를 제작하는 데 있어서도 제 아들이 각본을 많이 도와주고 있구요. 어쨌든 제 아들에게도 그 세대 간에서 전달되는 트라우마가

분명히있을것같습니다.아들이직접와서그것에대해얘기하는게 좀정확할것같습니다만,저도제가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를 아들에게 전해주고 싶지 않고 그러지 않으려고 굉장히 노력하고 있지만 그러기엔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 가족은 많은 기쁨을 함께 누리고 있습니다.

 

 

Question (김장연호 집행위원장님)

어제도 고기 같이 먹었잖아요. 되게 밝으시고 이제 사회 문제에 관심이 상당히 많으십니다. 오늘 오셨으면 진짜 좋았을 것 같아요. 이게 이제 첫 작업이고 두 번째 작업을 차정희를 찾아서라고 하는 작업을 만드셨어요. 그래서 1인칭 복수에서 잠깐 나오죠. 차정희 그다음에 강옥진이라고 하는 어떤 이름의 발견. 사실 여기에서는 그 부분이 약간의 작은 스토리로 이제 담겨져 있지만 차정희를 찾아서는 전체의 테마 자체가 차정희를 정말 찾아가는 그 과정을 그리고 있는 다큐멘터리입니다.

그래서 이 작업으로 선댄스 영화제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수여를 하게 되고 그리고 저도 그 작업을 2013년도에 소개를 하게 됐는데 ‘차정희를 찾아서’라고 하는 작업도 상당히 중요한 작업이란 생각을 합니다. 맨 처음에는 강옥진이라고 하는 나를 발견했다고 하네요. 또 어떻게 보면 차정희와 또 다른 강옥진과 또다른 사람들을 발견하고 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는 그런 작업의 첫 출발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는데요. 그 이야기도 좀 같이 좀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nswer (Deann Borshay Liem)

제가 첫 번째 작품 ‘일인칭 복수’를 하고 난 다음에 감정적으로 굉장히 힘들었고 트라우마도 있었기 때문에 다음 작품을 시작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부터는 제가 탐색하고자 하는 의문점들이 더 남아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그래서 ‘차정희를 찾아서’라는 두번째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제가 되었어야하는 그 여자아이를 찾기 위한 이야기이며 제 정체성을 받아들이기 위해 만들었던 영화입니다. 또한 한국 아이들의 입양 과정에서의 윤리; 어떻게 어린아이들이 상품화, 물체화 되는가를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Question

차정희씨라고 알고 있다가 나중에 강옥진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 어떤 기분이셨는지 궁금하고요. 그리고 차정희씨를 혹시 찾아서 만나보신 적이 있나요?

 

Answer (Deann Borshay Liem)

제가 차정희가 아니라 강옥진이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버클리 대학교에서 마지막 학년을 하고 있었을때 오빠가 보낸 편지를 읽고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빠의 편지는 영어 였고, 저는 처음에 강옥진이라는게 이름인줄도 몰랐고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내용을 봤는데 제가 강옥진이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강옥진이라는 이름을 읽어야 했을때 강 오케이(ok) 진이라고 읽었었어요. 어떻게 발음해야하는지 몰랐거든요. 그래서 생각했죠. “내 이름이 강 오케이 진이라고?”.

 

Question

감독님에 대한 개인적인 질문인데요. 일단 저도 입양이 되어서 나중에 한국 가족을 재회한 지 6년이 되었습니다. 굉장히 큰 언어적 장벽과 문화적 장벽을 느꼈죠. 하지만 영화를 보고 제가 느낀 바로는 감독님은 가족들과 재회를 하신 것 같아요. 영화를 만드신 시기를 기점으로, 감독님은 한국 가족들과의 관계에 있어 어떤게 변화 했나요? 특히 감독님의 생모와요.

 

Answer (Deann Borshay Liem)

제가 한국 가족과 재회한 지는 40년이 되는데요. 이 재회이라는 게 한순간에 끝나는 게 아니라 전 세계 걸친 여정 긴 여정인 것 같습니다. 지금 현재로써는 저희 미국 부모님도 한국 부모님 모두 작고를 하셨습니다. 저는 한국어를 배워 어머니와 말을 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후회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제 어머니와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한국어를 통해서 대화를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 굉장히 안타깝군요. 제가 한국어를 굉장히 배우려고 노력했지만 한국어라는 이 언어의 장벽을 절대로 넘어서지 못했다는 거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언어나 문화적인 이런 장벽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동질감과 굉장히 많은 사랑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계속해서 이 가족과의 상봉이라는 여정을 지속해 나가고 있구요.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인 역사 중, 특히나 저희 어머니가 살아계셨던 역사가 어떻게 펼쳐있었는지 어떻게 상황이 이렇게 됐는지 어머니가 한국의 그 당시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 환경에서 여성으로서 살아갔던 내용들을 내가 더 많이 알게 된다면 어머니에 대해서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다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제가 최근에 알게 된 단어 중에 한국어 단어가 있었는데, ‘정’이라는 단어에요. 아마도 제가 이걸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입양 됨으로써 한국의 가족들과 완전히 단절되어서 정이라는 것이 존재했는지 몰랐었어요. 하지만 ‘정’이라는 단어를 배우고 나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정이라는 단어에 어떤 환상이 있었던 걸 수도 있어요. 어쨌거나 제가 입양을 가면서 느낀것을 저희 가족들도 똑같이 느끼진 않은 것 같아요. 제가 그곳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제 가족들은 저와 이어져 있다고 느꼈고 제가 그 가족 구성원에 존재 한다고 생각 했던 것이죠.

저는 차정희라는 이름으로 입양된 거지 강옥진이란 이름으로 입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강옥진은 절대 입양된 적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강옥진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남아있었어요. 저희 가족 호적에 제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오빠가 저로 하여금 이 호적 상태를 바꾸라고 하고 있어요. 왜냐면, 저희 오빠 입장에서는 다른 가족들은 다 출가해서 호적에서 나갔는데 제 이름이 아직까지 호적에 남아있는 거에요.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아직까지 저희 가족하고 함께 협의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이런 가족과의 만남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전 생에 걸친 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무리 인사 (김장연호 집행위원장님)

시간이 이제 없어서 마지막 질문 있으신가요? 약속한 시간이 이제 거의 다가와서 마무리를 해야 될 것 같은데요. 어제 KT&G 상상마당 시네마에서는 친족의 지리학이라고 하는 작업하고 이제 마스터 클래스를 진행을 했었어요. 아마 ‘차정희를 찾아서’ 보시고 ‘친족의 지리학’까지 보시면 어느 정도 디엔 볼쉐이 림 감독님이 생각하고 어떤 관점에서 보여지는 해외 국제 입양에관한 스토리를 조금 아실 수 있을거 라는 생각을 해요. 그런 입양되신 분들이 25만 명이거든요.

저도 계속 관심있게 보다보니까 저하고 비슷한 나이대 60,70 80년생 입양이 너무나 많이 간 거예요. 그 시기에 같이 살았던 동시대에 나의 또 다른 친구들이 해외에 입양을 가게 된거죠. 가장 많이 갔던 시기가 60, 70, 80년대 생이에요.그래서관심을가질수밖에없다는생각이들고그리고그부분에대한아픔과그정체성을 찾아가는 그 과정들이 지금도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인 거거든요.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외로 사회적 환기가 너무나 안되어 있다라는 생각을, 70년이나 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이 들었고 여전히 한국은 해외 입양을 지금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들이 지금 사회적 환기가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면, 해외 입양이라고 하는 국제입양의 문제가 왜 일어났을까? 한국이라고 하는 사회에서 전쟁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가장 큰 중요한 문제는 한국이 갖고있는 여성에 대한 문제로 이것을 가져갈 수밖에 없다. 라는 생각이 저는 좀 들더라구요. 가부장제에서의 미혼모, 가난한 여성 아니면 딸을 많이 낳아서와 같은 이유들이 되겠죠. 지금 현재는 미성년 아이들이 낳은 아이들이 해외에 입양을 갑니다. 미성년이자 미혼모가 된 여성의 출산과 아니면 사회적인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낙인화된 여성의 신체라는 게 있잖아요. 거기 벗어나면은 안되는 그 라인 때문에 일어나는 것들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상당히 많이 해서 이것은 계속 꾸준하게 매일매일 우리가 같이 복기해야지 되는 문제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6.25의 한국전쟁만큼 이거는 계속 우리가 일상적으로 계속 끊임없이 사회적인 공론의 장으로 만들어야 된다라는 그런 생각까지 들게 됐습니다.

 

사진 기록 : 안돌용 운영위원장

녹취 및 정리: 박시원 (시네마기획운영팀 ALT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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