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제롬 에버슨 Kevin Jerome Everson

시네미디어 큐레이팅 포럼 Cine-Media Curation Forum 2025


 

케빈 제롬 에버슨의 영화적 실천
          : 노동의 리듬과 이미지의 존엄

 

"제가 주로 하는 일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흑인들이 자신이 잘하는 일을 하는 모습을 찍는 것입니다. 그들의 재능을 보여주고자 하죠. 저는 화면 속 인물이 관객보다 한발 앞서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구성을 선호합니다. 이는 그들이 ‘내부 언어’에 몰두해 있기 때문입니다. 갈등을 만드는 대신, 편집을 통해 관객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듭니다. 이야기를 전달하기보다는 상황의 조건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죠. 저는 단지 예술을 만들고 싶을 뿐이며, 중서부 노동계층 흑인들의 존엄한 모습을 담고 싶습니다."
— 케빈 제롬 에버슨

 

케빈 제롬 에버슨(Kevin Jerome Everson, 1965-)은 미국 현대 영상예술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감독이다. 그는 대이동 시대 미시시피 출신 부모 밑에서 오하이오주 맨스필드에서 자랐으며, 미국 중서부와 남부의 사회경제적 상황 및 역사와 긴밀히 연결된 영화를 제작한다. 특히 노동, 이주, 언어, 문화 등 장소 특유의 조건을 주요 소재로 삼아, 이러한 조건이 형성하는 구체적인 몸짓과 관습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감독의 정체성 탐구는 자연스럽게 미국 흑인 공동체의 일상과 노동, 장소성을 미시적으로 포착하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그의 영화는 각본과 다큐멘터리적 순간을 형식주의적 요소와 결합한다. 이는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넘나들며, 재연과 기록 전략을 통해 미국 중서부와 남부에 사는 사람들의 몸짓, 리듬, 사회적 구조를 시적으로 재구성한다. 특히 에버슨은 16mm 필름이라는 물질적 매체를 적극 활용해, 빠른 디지털 영상 소비 속에서 소외된 ‘시간의 잔여’와 ‘노동의 흔적’을 깊이 있게 재현하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무엇보다 제한된 편집과 로케이션 사운드, 그리고 필름의 물질성을 통해 꾸며지지 않은 삶의 감각을 구현함으로써, 기존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독자적인 미학을 구축한다. 

공동체의 리듬을 기록하는 감각적 실천

그의 작품은 실험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나, 그 안에는 공동체의 정동, 노동의 리듬, 신앙의 흔적, 장소의 기억이 촘촘히 새겨져 있다. 이번 작가전에서 소개하는 〈사운드 댓 Sound That〉(2014), 〈이슨 Eason〉(2016), 〈트래블링 슈즈 Travelling Shoes〉(2019) 세 작품은 주제와 형식은 다르지만, 에버슨의 영화 언어가 공유하는 노동, 시간, 신체, 공동체의 정동적 층위를 탐구한다. 특히 16mm 아날로그 필름 고유의 질감을 통해 그 현장을 물성의 층위로 가시화하며, 디지털 영상에서 흔히 소거되는 시간의 밀도를 되살린다.*** 이러한 점은 다큐멘터리의 사실성을 재현하기 위한 전략이라기보다는, 삶 자체의 리듬과 감각, 그리고 시간의 두께를 지각하게 만드는 미학적 장치로 읽힌다. 그것은 다큐멘터리의 외양을 두르되, 기록이나 서사를 단순히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그것을 감각하도록 만드는 고도의 영화적 실천이다. 

Sound That (2014)
<사운드 댓 Sound That>은 에버슨의 품질 관리 프로그램의 주제를 이어받는 작품 중 하나로서 특정 분야나 기술에서 비롯된 전문 지식에 대한 존중이 담겨 있다. 이 작품은 클리블랜드 수도국(Cleveland Water Department) 직원들이 카야호가(Cuyahoga) 카운티의 기반 시설에서 누수를 찾기 위해 작업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감독은 “내가 하는 일은 흑인들이 잘하는 일을 찍는 것이다. 그들의 기술과 집중력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한바 있다. 이것은 재현의 정치학을 벗어나, 인물의 몸과 리듬에 내재된 능동성을 포착하려는 태도다. 작품은 노동자의 몸이 경험하는 긴장과 해방, 그리고 그 속에 흐르는 리듬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감독은 노동하는 신체를 연민이나 고통의 대상으로 그리지 않는다. 대신 훈련된 리듬과 몸의 감각을 통해 노동을 침착하게 묘사하며, 노동과 예술이 같은 깊이 있는 시간성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영화에는 뚜렷한 이야기, 갈등, 해소가 없다. 대신 반복과 정지, 망설임과 기다림 같은 시간이 흐른다. 이는 노동을 설명하거나 재현하려 들지 않는 대신, 노동이 살아 있는 리듬, 손의 감각, 장소의 호흡을 통해 그 자체로 드러나게 만든다.

Eason (2016)
<이슨 Eason>은 펜실베니아 필라델피아 스크라이브 비디오 센터(Scribe Video Center)가 의뢰한 흑인 대이주(Great Migration)*****100주년 기념 프로젝트로 제작된 작품이다.****** 제목은 필라델피아 UNIA(Universal Negro Improvement Association, 세계흑인지위향상협회) 회원이었던 제임스 워커 후드 이슨(James Walker Hood Eason, 1886–1923)의 이름을 따왔지만, 작품은 그의 삶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감독은 이슨의 전기를 따라가기보다는, 그가 속했던 장소와 공동체의 기억, 정동이 남긴 흔적들을 소리와 이미지의 잔여로 호출하며, 도시 공간의 내면적 구조에 집중한다. 이것은 ‘재현’의 틀에서 벗어나, 감각의 구조로 이행하려는 에버슨의 일관된 영화적 실천을 보여준다. 그는 역사적 인물의 삶을 서사적으로 재현하기보다, 그들이 남긴 정서적 리듬과 분위기를 시청각적 감각으로 전달한다. 〈Eason〉은 그러한 접근 방식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에버슨의 미학은 서사의 고정된 형식이 아니라, 불완전하고 감각적인 언어를 통해 장소성과 정동을 현현하는 데 있다. 작품은 역사적 인물보다는 그 인물이 존재할 수 있었던 문화적 조건과 장소의 리듬, 정서를 지각하게 만든다. 〈Eason〉은 비어 있는 기념비처럼 말없이 존재하지만, 동시에 살아 있는 공동체의 초상으로 다가온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오히려 관객의 정동적 몰입과 능동적 해석을 유도한다. 이는 형식 실험을 넘어서, 흑인 공동체의 시간성과 노동, 기억의 정동을 감각적으로 포착하며, 에버슨 특유의 윤리적 미학을 집약한다.

Travelling Shoes (2019)
<트래블링 슈즈 Travelling Shoes>는 오하이오의 가스펠 그룹 브라운 싱어즈(The Brown Singers)의 히트곡 “Travelling Shoes”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작품이다. 영화는 오하이오의 가스펠 그룹 브라운 싱어즈 (Brown Singers)의 동명 곡에서 출발한다. 실제 해당 곡을 녹음한 두 인물인 시드니 브라운 주니어(Sidney Brown Jr.)와 로버트 휘트필드(Robert Whitfield)의 인터뷰와 45인치 레코드를 손에 든 여성의 정적인 이미지가 교차 편집되며 구성된다. 곡이 지닌 주제는 ‘죽음 이후의 여정’이자, 흑인 가스펠이 지닌 ‘영적 승화의 서사’이다. 이 노래는 죽음 이후의 여정을 노래하는 전통적인 흑인 가스펠로, 삶의 끝에서 신앙을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이동하는 믿음과 그 감정을 담고 있다. 에버슨은 이 주제를 직접적으로 재현하지 않고, 이미지와 침묵, 시선과 필름의 질감으로 호출한다. 이 곡의 기억은 발언하는 인물의 표정, 말의 리듬, 침묵 사이의 여백, 그리고 원반을 들고 정면을 응시하는 여성의 정적인 이미지가 서로 간극을 유지하며 배치된다. 16mm 흑백 필름의 아날로그적 물질성은 사라져가는 기억의 입자이자, 공동체가 간직해온 영적 정체성의 잔재다. 그리하여 관객은 정동적으로 이 ‘노래’와 ‘시간’이 지닌 울림을 느끼게 된다. 


내부 언어와 이미지의 윤리
에버슨의 작품은 반복되는 제스처와 순간의 풍경을 통해 관객의 집중을 유도한다. 이러한 서사의 파편화는 단순한 형식 실험을 넘어, 주류 사회에서 주변화된 공동체의 시간성과 기억을 보존하고 재구성하는 정치적 행위로 기능한다. 그는 영화 속 인물을 ‘내부 언어’를 지닌 주체로 바라본다. 이는 그의 영화가 내러티브 중심이 아니라 ‘상황의 조건’을 드러내며, 관객 스스로 의미를 발견하고 해석하도록 하는 이유다. 감독은 흑인 노동 공동체를 단순한 사회적 메시지로 환원하지 않고, 그들의 삶이 지닌 고유한 리듬과 감각, 윤리를 존중하는 태도를 견지한다. 또한 미국 사회의 인종적·계급적 맥락을 환기시키되, 직접적인 비판이나 고발은 피한다. 대신 일상의 정동을 통해 타인의 삶을 대상화된 이미지로 환원하지 않고, 고유한 리듬과 윤리로 존중하려는 태도를 유지한다. 에버슨의 영화가 국제 영화제와 미술관에서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히 ‘흑인 감독의 리얼리즘’ 때문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영상예술이 시간과 노동, 공동체와 장소, 그리고 이미지 윤리를 다루는 방식에 근본적 질문을 던지며, 동시대 현대예술에서 시청각 언어를 확장하는 실천으로 작동한다. 테이트 모던, 퐁피두 센터, 휘트니 미술관 등 주요 기관에서 소개된 것은, 그가 사회적 현실을 증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현실을 어떻게 감각하고 구성할 것인가에 관한 형식적·윤리적 질문을 함께 제시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그의 카메라가 침묵하는 모습을 보며, 감각의 언어를 새롭게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시네미디어 큐레이터 정세라, 더 스트림 디렉터, 미술비평가)


* “ARTIST IN FOCUS: Kevin Jerome Everson”,  https://www.diagonalthoughts.com/?p=3338
**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Kevin Jerome Everson,” https://whitney.org/artists/11215
*** Laura Marks, The Skin of the Film: Intercultural Cinema, Embodiment, and the Senses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0), 12‑15.
**** The Herb Alpert Award in the Arts, “Kevin Everson 2012“ https://herbalpertawards.org/artist/2012/kevin-everson
***** 흑인 대이동(Great Migration): 20세기 초, 약 600만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인종 차별을 피해 미국 남부에서 미국 북부로 이주한 대이동.
****** Scribe Video Center, https://scribe.org/search/node?keys=kevin+Jerome+Everson


 

일시 2025년 8월 10일 (일) 18:00
Date August 10 (Sun) 18:00

장소 KT&G 상상마당 시네마(지하 4층)
Venue KT&G Sangsangmadang Hongdae Cinema (B 4F)

상영시작전 큐레이터 코멘트 정세라(시네미디어큐레이팅포럼 <케빈 제롬 에버슨의 영화적 실천: 노동의 리듬과 이미지의 존엄
Curator's Note before Screening Jung Sera(Cine-Media Curating Forum: “The Cinematic Practice of Kevin Jerome Everson – The Rhythm of Labor and the Dignity of the Im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