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어complement’의 윤리:
“칠롱의 방”에 부쳐
동사 ‘되기become’의 보어는 일반명사여야 한다. 고유명사나 대명사는 ‘되기’의 보어가 될 수 없다.* ‘나’는 변호사나 의사는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뉴진스의 다니엘이 될 수 없고, ‘너’는 ‘나’가 될 수 없는 탓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주, ‘되기’의 보어에 고유명사나 대명사를 넣곤 한다. 정확히 말하면, 고유명사나 대명사를 넣고 ‘싶어’ 한다. 이러한 마음이 공감과 애정을 지탱하는 한 축일 것이다. ‘나’는 ‘너’가 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가 되어보고 싶어. 그렇게 ‘너’를 더 이해하고, ‘너’의 감각과 느낌과 마음을 알고 싶어.
“칠롱의 방”의 감독 안두이는 ‘되기’의 보어에 고유명사를 넣는 일에 능한 사람인 듯 하다. 정확히 표현하면, ‘되기’의 보어로 고유명사를 넣는 일에 능해지고픈 사람인 듯 하다.
웅담 채취용으로 길러졌던 곰들을 보호하는 시설 주변을 관찰하며 안두이의 영화는 시작한다. 화자는 곰을 보며 아이샤라는 이름의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보호시설의 ‘활동가’들은 버려져서 갈 데 없는 곰들이 “늙어 죽을 때까지 잘 먹이기라도” 하기 위해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이 시설에서 보호받고 있는 곰들 중 한 마리인 ‘칠롱’은 좁은 우리 안에서 별다른 할 일이 없기에 10초마다 한번씩, 매일 칠백 번 가까이 우리 안을 빙빙 돌기만 한다. 그러다가 활동가들이 밤이나 당근, 계란 따위를 넣어주면 그것을 부숴 먹는 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인 듯 하다. 안두이는 그런 칠롱을 보면서, ‘우리 속에서 사는 삶’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것일지 아이샤에게 서간체로 물으며 말한다. “상상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더라.”
이 ‘잘 안 됨’은 필연에 의거한다. 영화 속 화자는 칠롱도, 아이샤도 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심지어 화자의 윤리는 자신이 아이샤에게 안부를 물을 수 있는 것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화자는 계속해서 시도한다. 칠롱이 먹는 생고구마가 맛있을지, 칠롱이 느끼는 땅콩의 맛은 어떤 것일지, 칠롱이 느끼는 취두부의 향은 어떤 것일지, 이러한 궁금증이 해소불가능과 닿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계속해서, 질문한다.
이 질문은 답을 얻을 수 없음이 확정되어 있기에 미약하다. 하지만 이때의 미약함은 무능함과 달라서, 무엇인가를 해내곤 한다. 미약한 질문의 반복은 칠롱이 강원도의 보호시설에서 존재할 수 있게 하고, 신문 기사에 나온 아이샤의 존재를 인식하게 한다.
아이샤는 화자의 친구도, 아는 사이도 아니고, 전쟁을 피해 한국에 망명 온 난민이다. 화자의 나레이션은 파도의 일렁임, 부스러지는 포말과 함께 아이샤를 본 순간에 대해 설명한다. 아이샤는 “두 손이 등 뒤로 묶인 채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사람이다. 그리고 다시, 화자는 그런 아이샤를 구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서술한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인지하며, “아무래도 이 편지는 보낼 수 없을 것 같다”며 말을 마친다. 물론, 화자 한 명의 질문은 누구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화자가 한 질문이 스크린을 통해 공유되고, 공명하여 반복되어 사람들이 모였을 때 구해낼 수 있을 누군가를 상상한다. 실패를 내재한 편지는, 아이샤가 아닌 이들에게 닿음으로써 미래의 성공을 가늠할 것이다.
* 물론, 고유명사 중 집합을 나타내는 말은 ‘되기’의 보어가 될 수 있으나, 이때의 ‘되기’는 상술한 맥락의 ‘되기’와 의미론적으로 구분된다.
글. 유미주. 시각문화 비평가
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