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멸의 공존>: 강물 위의 이방인, 괴물과 이웃 사이의 경계를 짚어내기
<박멸의 공존>은 ‘공존’의 입장에서 ‘박멸’을 역추적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이면에 숨겨진 생태적 딜레마를 포착한다. 이 영화는 한때 '괴물쥐'라는 오명으로 낙인찍혔던 뉴트리아의 존재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복잡다단한 관계를 심도 있게 탐구하고 있다.
감독은 행정가와 동물 운동가, 그리고 뉴트리아가 가장 많이 죽은 지역을 오간다. 이러한 이동은 인간의 시스템과 생태계의 흐름을 짚어가며 우리의 시선을 확장시키는 행위이다. 2019년과 2023년, 두 시간의 강을 건너며 감독은 우리에게 공존이 무엇인지, 그리고 공존이라는 단어를 누구의 입장에서 사용하고 있는지를 짚어낸다. '유해종'에서 '토착종'으로, 그리고 '박멸'에서 '공존'으로의 여정은 복잡다단한 층으로 쌓여있다. 영화는 특히 우리에게 미치는 '언어'의 힘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감독은 '괴물쥐', '유해종', '박멸' 등의 단어들을 통해 어떻게 인간이라는 한 집단이 또 다른 한 생명체의 운명을 좌우하는지, 그리고 그 언어들이 어떻게 변화하며 우리의 인식을 바꾸어가는지를 좇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영화가 보여주는 '관점의 다양성'이다. 행정가, 환경운동가, 포획 전문가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사람들의 말은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죽음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행정화된 언어와 예측이라고 가장된 혼란 사이에, 실질적인 해결책을 모르겠다는 고백의 순간 사이에도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던 존재들이 있다. 집단 살해와 허울 좋은 ‘균형’이라는 단어 사이에서 실질적으로 발생하는 일들은 ‘아무것도 없음’으로 흐른다. 동물과 우리는 어떤 식으로 같이 있는가?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좀 더 평등한 동물이 있다’는 조지 오웰의 말을 떠올려보면, 그리하여 ‘인간’은 조금 더 평등한 존재들인가?
그러나 2019년과 2023년을 가르는 가장 주요한 지점은 실질적으로, 그리고 가장 직접적으로 뉴트리아와 마주했던 포획 전문가의 변화 자체이다. 박멸을 목표로 하는 행정가와, 그들이 살해되고 있음을 문제 삼는 동물단체는 실제로 ‘포획’하고 ‘안락사’ 시켰던 사람과 ‘유해종’을 대하는 ‘물리적인’ 거리가 존재한다. 결국 뉴트리아라는 존재의 인식적 변화는 뉴트리아를 죽이는 것에 정말로 진심이었던, 그러나 그들과 가장 가까웠던 포획 전문가에게서 나타난다. 가장 많은 죽임을 행했던 사람은 ‘공존’에 가닿는다. 그들이 이미 정착했음을 인정하는 목소리, 그리고 어느샌가 그들이 목표했던 박멸이 ‘살생’이라는 단어로 바뀌는 그 사이. 무수히 유해종을 제거해 왔던 사람과 유해종이 그저 생명체가 되는 그 사이에 맺어지는 존재 간의 유대는 친절함-혹은 이해함-으로 변화한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뉴트리아의 낙동강 살이는 인간이 상상한 언어를 몸에 감는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다시 이를 보는 우리에게로 돌아온다. ‘우리는 누구이길래 살아가는가?’ 무엇을 박멸로, 무엇을 공존의 대상으로 여길 것인지에 대한 인간적 관점을 카메라의 시선으로, 그리고 장착된 카메라의 시선으로 바꾸는 <박멸의 공존>은 현대 우리 사회가 짚어봐야 할 지점을 가리킨다.
<박멸의 공존>은 우리에게 '공존'의 진정한 의미를 묻는다. 그것은 단순히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경계와 구분을 넘어, 모든 생명이 연결되어 있음을 상기시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다. 누구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뉴트리아라는 한 종(種)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태학적 책임과 윤리적 선택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박멸의 공존>은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
글. 이인. 네마프2024 비평웹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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