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할 수 없는 몸과 마음 : 최예린의 <숲, 틈>에 관하여
푸르른 잔디밭을 배경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곧이어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재생된다.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다. 다중의 목소리가 입을 모아 하나의 글을, 그들 자신의 언어─일본어─로 낭독한다. ‘일본(japan)’을 ‘우리나라( わ が くに)’로 발음하는 목소리는 이들의 내부자로서의 위치를 드러낸다. 100인의 일본인에 의해서 낭독되는 이 글의 정체는 바로 일본 군마현 ‘군마의 숲’에 위치한 조선인 노동자 추모비의 비문(碑文)이다.
목소리는 녹음된 것으로, 과거의 것이다. 영화 첫머리의 딸깍, 하는 소리가 드러내듯, 100인의 낭독은 과거에 이루어진 것이다. 동시에 그들이 낭독하는 비문 또한 과거에 쓰인 것이다. 21세기의 한 시기에서 20세기의 한 시기에 있었던 일에 관해 쓰고, 새긴 글이 얼마간의 시간을 지나 다른 이들의 몸을 통해 전달된다. 글을 비에 새기는 일도, 그것을 낭독하는 일도 모두 사람의 몸을 통하는 일이다. 21세기의 수많은 몸을 경유해 20세기의 과거가 사라지지 않고 기억된다.
낭독하는 일은 몸으로 하는 일이다. 눈과 입을 사용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를 통해 문장을 소리로 변환하는 일이다. 따라서 낭독하는 낭독자의 몸은 차라리 하나의 변환 장치와도 같다. 그러나 사람의 몸은 기계가 아니므로, 몸을 통해 소리로 변환된 문장은 그 잔여를 몸 어딘가에 남겨 둔다. 그리하여 낭독은 기억을 전달하는 것일 뿐 아니라 새로운 기억을 새기는 일이 된다. 100인의 낭독자는 곧 기억의 전달자인 동시에 보유자가 된다. 앞으로 그들은 이 기억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과거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현재의 사람들을 보여주며 영화가 가시화하는 것은 기억의 자리다. 철거를 앞둔 어느 날, 21세기의 사람들은 추모비 앞에 모인다. 2004년의 어느 날 그랬던 것처럼, 20년이 지난 뒤인 2024년에도 사람들은 모인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들은 모여서 마음을 나눈다. 철거를 반대하는 모임의 발언자는 “꽃이나 메모는 사라지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의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곳에 모인 이들을 향해서 “서로 친해지기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해”달라고 말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다양한 친구를 만들어서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는 기회”로 삼아달라고 말한다. 이러한 발언이 드러내듯, 수십 년의 시간을 지나며 기억이 전달되고 매개되는 경로는 바로 사람들을 통해서였다. 정확하게는, 그들의 몸을 통해서다.
그러나 몸은 시간의 흐름 앞에서 속절없다. 몸은 결국에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인간의 몸이든, 비석의 몸체든, 생명이 깃들어 있든 깃들어 있지 않든 간에 상관없이 말이다. 시간의 흐름과 사라짐 앞에서 영화가 택하는 방법은, 과거의 이들에서 현재의 이들에게 기억이 이어져 온 방식과도 닮아 있다. 100인의 낭독자의 시간은 과거보다 미래에 놓여 있다. 앞으로의 시간 속에서 그들의 몸이 곧 기억의 매개가 될 것이다. 낭독자뿐 아니라 추모비 철거를 반대하는 모임에 함께 한 이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서로의 세계를 확장한다. 그렇게 20세기의 과거를 기억할 뿐 아니라 21세기의 현재 또한 기억된다. 추모비는 철거되지만, 추모의 마음과 철거될 수 없다. 이로써 영화가 가시화하는 기억의 자리는 물리
적 장소라기보다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 즉 그들의 존재에 있다.
김윤진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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