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륜 감독의 단편영화 <식물>은 우리가 외면하거나 언어로 다루지 않는 것들, 그중에서도 특히 죽음 이후의 세계를 고양이나 화초 같은 말 없는 존재들의 시선으로 조명한다. 이 작품은 자극적이거나 극적인 전개를 따르기보다 감정을 절제한 시청각 언어를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조용히 응시하는 영화적 사유를 펼쳐 보인다.
영화는 한 여자아이가 말 없이 보이는 행동으로부터 시작된다. 놀이터에서 혼자 노는 아이는 민들레 홀씨를 불어 날린다. 이 홀씨는 바람을 타고 도시의 낡은 원룸 창문 사이로 스며들고, 그곳에는 자살 직후의 젊은 여성이 누워 있다. 말없이 등장하는 이 죽음은 슬픔이나 경악이 아니라 무표정한 죽음으로 연출된다. 그렇게 고요한 공간 속에 자리한 죽은 여성 곁으로 고양이 ‘까망이’가 들어온다. 까망이는 떠나지 않고 여성을 바라볼 뿐인데, 이때 고양이의 무심한 듯 응시하는 눈동자는 죽음을 감각하는 비인간적이면서도 어쩌면 가장 윤리적인 시선이다.
이윽고 여성의 손목 상처 위에 떨어진 민들레 씨앗이 싹을 틔울 때 영화는 이 놀라운 사건을 슬로 모션이나 감정적 음악을 동원하여 극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대신 정지된 쇼트 안에서 생장의 시간이 무심하게 흘러갈 뿐이다. 이때 여성의 몸은 더 이상 인간 중심의 기능적 신체가 아니라 식물의 양분이 되는 토양이 되며, 영화는 이 순간 죽은 몸도 여전히 세계 속에서 유효할 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존재는 이어진다는 생태적 윤리를 묵묵히 전달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죽은 여성 주변에 남겨진 음식과 화초들이 부패하고 파리가 날아들어 방치된 공간마저 죽음으로 가득한 순간, 그 모든 썩어감의 한가운데서 맑고 푸른 식물은 계속 자란다. 이를 통해 감독은 죽음과 생명이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으며 소멸이 새로운 생의 시작이기도 함을 시각적으로 입증한다. 특히,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파리 날갯짓 소리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음향 장치 중 하나로, 감정적 설명 없이도 그 소리만으로 관객들은 그 공간에 깃든 죽음의 시간과 생태적 순환을 감지한다.
영화의 종반부에서는 여자아이가 까망이를 찾기 위해 죽은 여성의 집 근처를 서성이다 여성의 손목에서 떨어져 나온 민들레 싹을 발견한다. 아이는 그것을 소중히 품에 안고 ‘초록이’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이 장면은 영화 전체의 정서적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말 없는 존재에게 말을 걸고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는 단순한 애착을 넘어서 존재의 복권이자 기억의 선언이나 다름 아닌데, 죽은 여성이 남긴 유일한 생명의 흔적이 아이의 손에서 다시금 관계의 언어로 되살아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최고 명장면을 꼽으라면 여자아이가 ‘초록이’를 안고 햇살을 받으며 공원으로 달려가는 장면을 꼽고 싶다. 아이는 숨이 차오를 때까지 달려 공원의 초원에 이르자 하나, 둘, 셋 숫자를 센다. 이러한 무의미한 듯한 숫자의 반복은 아이만의 방식으로 죽음을 감각하고 생명을 살아내는 의례라 할 수 있겠다. 또, 아이가 열을 센 직후 들리는 가쁜 숨소리는 죽은 여성이 남긴 무언의 흔적을 살아 있는 호흡으로 전이시키는 매개로 작동한다. 그렇게 영화는 말하지 않고도 생명을 위로하는 방법, 존재를 받아들이는 방식, 죽음을 기억하는 윤리를 조용히 전달한다.
이렇게 영화 <식물>은 인간의 언어를 빌리지 않고 침묵 속에서 말하며, 정지된 공간 안에서 움직이고, 썩어가는 몸 위에서 피어난다. 영화는 카메라를 통해 죽음을 소비하지 않고 응시하는 방식 그리고 삶에 대한 교조적 설교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감각하는 방식을 제안한다. 그리하여 <식물>은 침묵을 견디고 존재를 기억하며 죽음을 통과해 생명을 품는, 가장 조용한 방식의 위로로 남는다.
윤필립 평론가
영화평론가, 응용언어학자, 영상번역가. 계명대, 연세대에서 국문학, 영문학, 국어학(한국어교육)을 전공했고, 시나리오작가협회에서 작가 교육 과정을 수료했다. 나라꽃 무궁화 스토리 텔링 공모전(산림청)에서 동화 부문 입선을, 서울국제사랑영화제(SIAFF) 기독교 영화비평 대상 수상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 당선을 했다. 만화평론상, 대종상,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및 부일영화상 심사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사)한국영화평론가협회와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한국 본부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한겨레신문 <한국영화사 100년, 한국영화 100작품>, KBS ‘우리 시대의 한국영화 50선’ 집필진으로 참여했으며, 대학에서 한국 언어/문화교육, 담화분석, 한국 대중문화, 인문치료 분야를 연구하고 강의하고 있다.《르몽드 코리아》, 《영화의 전당》, 《경기일보》 등에 영화와 문화에 관한 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영화와 가족』, 『영화와 권력』, 『영화와 육체』(이상 르몽드) 등을 공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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