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흐르트 셰버마커르(Margriet Schavemaker)는 미술관을 협상의 공간이자 변화와 실험의 에이전트라고 이야기했다. 여기서 우리는 미술관 건물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것이 꼭 물리적인 공간일 필요는 없다. 네마프의 대안영상예술한국단편부분에 선정된 작품들이야말로 네마프가 에이전트하는 변화와 실험의 리트머스 작품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김효정이 제작한 4분 13초의 애니메이션 <첫 숨>은 눈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이야기의 원형은 세대를 아울러 공감과 소통되는 이야기지만, 이 협상의 공간에 지속해서 젊은 작가를 초청해야 하는 이유를 모순되게도 작품의 주제 의식에서 찾고자한다. 이것이 ‘자기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작가(감독)는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이 작품은 새로운 세대의 경험과 세계관을 반영한다. 동시대의 결핍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역시 동시대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예민한 시대 감수성을 가지지 못한 대다수는 자기 시대의 관점으로 현재와 미래를 인지하게 된다. 여기에 젊은 작가의 시각은 이 왜곡을 수정 보완하는 데에 영감이 된다.
<첫 숨>은 표현에 있어 콜라주와 같은 이미지를 통해 왜곡된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숲의 이미지, 연못 아래에서 펼쳐지는 비비드한 순간, 눈 뜸 이후 선형태의 인물들은 각 새로워진 인식의 장을 표현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모두 비슷하게 불완전 하다. 그리고 이 점은 단순하게 종결된 단편의 서사를 역으로 확장하고 강화한다. 숲을 지나는 동안 이 인물들이 계속해서 새롭게 눈 뜨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생기는 것이다. 그야말로 이 눈뜸은 첫, 숨일 뿐이니까.
영상은 추상적인 이미지들을 통과해 구상의 세계로 나아간다. 이때 영상을 구현하기 위해 사용된 다양한 질감의 이미지들은 반복되는 사운드와 충돌하며 대사와 표정 없이도 관객에게 인물의 감정과 극의 정서를 전달한다. 주인공 인물은 에어캡 포장지의 얼굴을 하고 있다. 나머지 인물들은 말린 생선 대가리 같은 얼굴을 뒤집어쓰고 있다. 맨발로 함께 이 숲을 통과하고 있지만 이들은 서로에게 익명의 존재다. 숲의 가운데에 이르러 이들은 연못을 발견한다. 연못의 표면은 숲을 비추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다가서는 인물을 비춘다. 숨 차는 기침 속에서 주인공은 생생한 환영을 발견하지만 이 환영의 실체를 만나지는 못한다.
주인공이 스스로 뒤집어쓰고 있는 얼굴을 벗으면 비로소 화면과 부딪쳐 어기적거리는 사운드는 첫 숨을 틔운다. 그리고 마른 생선 대가리가 사람의 형상을 한 선형의 형태로 바뀌면 이제는 서로의 표정을 읽을 수 있고 그것으로 이들은 익명의 관계에서 벗어난다. 이 인물들이 숲을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인지, 혹은 돌입하는 중인지, 배회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의 다음 행로가 궁금해진다.
이 작품을 통해 질문을 하나 던져본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영상을 영화로 볼 수 있을 것인가?(나는 스스로 이것을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아직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결정하지 못한 듯하다. 미완의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불완전한 이미지는 얼핏 실험적인 결과물로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아이의 낙서와 추상작업을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있는 것처럼. 그러면 현재 시점에서 생성형 AI가 만든 영상을 두고 실험적 영상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니, 최소한 이 생성형 AI의 무작위 조합이 인간 보다 더 창의적인 도구라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AI는 우리의 전위적 세계를 무의미하게 할 것인가? 생성형 인공지능은 그것이 우연적일지언정 인간보다 더 낯선 이미지 조합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또, 잘 다듬어진 프롬프트는 매끄러운 움직임, 익숙한 환영을 구현해낼 것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창의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인공지능이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지 모르겠다. 인공지능이 영상문법을 이해하고 변용하고 뒤틀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주제로 연결해서 일관된 정서를 전달 할 수 있을까? 삶의 요소요소에서 겪게 되는 사소한 농담, 미묘한 감동, 시각의 전환, 유기적인 사유를 구성할 수 있을까?
실험영화는 언어 밖의 언어다. 우리가 실험적이라고 말하는 예술에서 전위는 하나의 무브먼트로 특유의 에너지를 전달하고 세계에 파문, 혹은 변화를 던진다. 아마도 오래지 않아서 인공지능은 전위를 흉내 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무브먼트를 만들어 내지는 못할 것이다. 전위의 파도 결마다 점점이 이어져 에너지를 증폭 해줄 (세계의)상호작용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터져나온 호흡이다. 어긋남을 느낀 일상의 어떤 순간, 사소한 인지 부조화, 관점의 변화, 미묘하게 느낀 감동, 이런 것들이 유기적으로 관계해 창조적 동기가 될 만한 에너지가 움텄다. 바로 이 무브먼트 지점이 바로 네마프가 에이전트하려하는 지속적인 협상의 공간이다.
정지혜 (영화평론가)
영화평론가, 아트라이터, 전시 기획자, 작가, 작가에이전시<mirrror> 대표. 여고괴담처럼 오래도록 동국대에 출몰하며 문예창작과 극작, 영화이론으로 학부 석사 박사과정을 거쳤다. 속초국제장애인영화제에서 대표 프로그래머로 활동했으며 지역 영화제나 개봉 영화의 GV에서 다수 진행과 해설을 통해 관객과 만나고 있다. 르몽드, 텐아시아, 영화의 전당, 지금 만화 등에 비평과 리뷰를 기고했고 KBS 순천 라디오를 통해 매주 청취자들에게 영화를 소개하고 있다. 2018부터 비정기적으로 미디어, 회화, 사진, 조형, 설치, 일러스트, 인형 등 다양한 층위의 전시를 기획했다. 문화예술 리터러시 교육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작가들과 현대미술을 가지고 노는 그림책 시리즈를 출판하기도 했다. 드라마, 영화, 연극, 웹툰 등 다양한 서사 매체에서 작업했고 대구대, 경남대 등에서 콘텐츠 시나리오 창작 강의를 했다. 현재 활발히 활동하는 젊은 작가를 밀어주기 위한 에이전시 밀어를 운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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