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전시장에 들어간다. 일반적인 화이트큐브의 모습이다. 그곳에는 각각의 벽면에 영상작품들이 투사되고 있다. 그런데 하나의 전시만이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전시장 한편에는 영상을 벽면에 투사할 수 있게 해주는 빔프로젝터 대신 무수한 선 다발이 바닥에서부터 뿜어져 나오고 있다. 바닥에 흩뿌려진 흙 사이로 솟아난 검은 선들. 마구 뒤엉킨 선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흥미를 돋운다.
선 끝에 연결되어 있는 두 개의 헤드폰에서는 서로 다른 소리가 나는데, 한쪽에서는 규칙적으로 들리는 망치질 소리와 무언가에 드릴을 박는 듯한 소리가 교차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마치 축음기에서 흘러나올 법한 소리가 들린다. 그곳에서는 과학을 비롯, 우리나라의 사회 경제적 발전을 찬탄하는 내용이 흘러나온다. 우리는 그 내용으로 미루어 이것이 1900년대 중반쯤 녹음된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박기훈 작가의 <깊이에의 강요>는 1960~70년대를 중심으로 당시 독일로 파견되어 높은 강도의 노동을 감행했던 파독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작가는 그중에서도 깊은 땅굴 속에서 석탄을 채굴하던 광부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한다. ‘사운드 설치작’이라는 작품의 장르적 특성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청각에서 촉발되는 이미지와 이야기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헤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광부들의 작업 소리와 당대 대중 방송의 소리를 오가며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체험하고, 또 눈앞에 놓인 굵은 선 다발과 상황들을 연결시킨다. 그렇게 관람객은 현재와 과거, 총 세 개의 다른 시공간을 다층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먼저 우리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작품의 외형은 소리의 근원지에 대해 상상하게 만든다. 설치되어있지 않았다면 그저 바닥에 지나지 않았을 지면은, 검은 선들이 심어짐으로써 지하,즉 탄광을 상징하는 알레고리로 기능하게 된다. 그렇게 바닥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산업발전의 영광에 가려져 제대로 발화된 적 없는 파독 광부들의 목소리가 공명하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또한 작품은 그렇게 함으로써 단순히 과거를 조명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이으려고 노력한다. 모든 관객은 전시를 관람하며 필연적으로 전시장의 바닥을 딛고 서 있게 되는데, 바로 이점이 어떠한 의미를 발생시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딛고 서 있는 현재가 무수한 외침과 희생으로 일궈진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렇게 관객이 감각 하는 시간은 단일한 현재에서 그것과 상호작용하는 무수한 과거들로 넓어지고 깊어진다.
이러한 입체적인 체험은 청각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앞서 말했듯 작품이 ‘사운드 설치작품’이라는 장르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청각은 <깊이에의 강요>를 경험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작품이 두 가지의 사운드를 교차시키는 방식은 여느 작품과 차별성을 지닌다. 지금껏 소리로부터 내러티브를 촉발시키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이와 같은 방식을 통해 서로 다른 세계를 교차하고 전유하며 만들어내려는 시도는 경험한 바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어떤 한 현상에 대한 양면성을 보여주어 작가로 하여금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게 해주기 때문에 참신한 동시에 현명하다.
그러나 이렇게 전시를 보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영상작품을 주로 전시하는 페스티벌에 청각을 중심으로 하는 작품이 어떻게 초청받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가장 먼저 유성영화의 탄생과 함께 판토마임을 벗어나 문학적인 성격을 강화하게 된 영화 고고학적 역사가 있고, 또 어떤 특정 분위기를 자아냄으로써 장면을 더욱 효과적으로 자아낼 수 있었던 음향학적 역사가 있고, 또...
사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이유는 단순하다. 무한한 상상이 우리의 시각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크린에 투사되는 이미지를 보는 것은 아니지만, 머릿속에서 어떤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어쩌면 어렴풋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상상 속 이미지의 연속이 영화 상영을 가능케하는 영사기의 매커니즘과 비슷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각자의 머릿속에서 수백 개의 서로 다른 영화를 보고 있는 셈 아닐까.
물론 이러한 해석은 비평적 독해라기보단 그저 망상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깊이에의 강요>를 관람하다 보면 그냥 그렇다고 믿고 싶어진다. 내가 영위하고 있는 삶이 그들과 연결되어있다는 기분. 오랜 시간이 지나 사라진 줄만 알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여전히 떠다니고 있다는 기분은 나로 하여금 어쩐지 안도감을 준다. 이들처럼 나의 생과 기억도 보존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까?
이처럼 박기훈의 작품 <깊이에의 강요>는 소거된 한 역사를 바라보는 첨예한 시선이 잘 담겨있는 날카로운 작품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감각 곳곳을 생경하게 한다는 점에서 말랑말랑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같은 상반된 두 감각 덕분에 관객은 온몸으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그들의 기억을 체화할 수 있다. 그렇게 역사의 산증인인 그들의 목소리는 단순한 볼거리가 아닌 결국 나와 세계를 이루는 한 조각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정말이지 잘 보이지 않기에 더욱 더 선명한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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