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한 저 사랑>은 유한한 삶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택한 사람들이 그들의 사랑을 어떻게 아카이브할 수 있을지를 시공간을 비틀어 바라보는 작품이다. 사랑을 아카이브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보존할 수 있을까? 작품의 등장인물인 ‘명’은 1억 5천만년 전으로 건너가 자신의 손가락을 콘크리트 풍경 속 흙바닥에 묻는다. 자크 데리다에 따르면 보통의 아카이브는 기억의 부재를 보상하고자 강박적으로 부재의 흔적을 남기는 프로이트적 징후인데, <고고한 저 사랑>에서 이러한 징후는 ‘명’이 직접 1억 5천만년 전으로 돌아가 자신의 손가락을 묻고 다시 현재 혹은 미래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깨진다.
‘명’ 그리고 ‘납’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의 도식적 흐름을 와해할 수 있다면, ‘명’과 ‘납’에게 시간은 언제나 현재다. ‘명’이 1억 5천만년 전으로 돌아가 손가락을 묻었다 해도, 그리고 ‘납’과 함께 그 장소로 돌아가 화석이 된 손가락을 파냈다고 해도, 그 행위를 하는 시간은 ‘명’과 ‘납’에게 현재다.
그렇다면 작품을 감상하는 “지금-여기”를 사는 우리와 작품 속 ‘명’과 ‘납’이 사는 세계를 구분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들이 사는 세계에서 데리다가 말하는 부재의 흔적은 남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서 사랑(손가락을 사랑에 관한 메타포라고 생각해 본다면)이라는 아카이브 불가능해 보이는 것은 아카이브된다.
그렇다면 이제 작품에게 그것을 감상하는 우리는 타인이다. 그러나 작품은 우리들과 함께하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작품이 박물관 시퀀스에서 이 지점을 명확히 했다고 생각한다. ‘명’과 ‘납’은 박물관에 간다. 시간대는 불분명하다. “발을 굴러도 먼지가 일지 않았다”는 점에서 지표(Index)가 없어져 버린 혹은 불가능한 장소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띄어 읽기가 불분명한 대화를 나눈다. 그러한 대화는 사진과 같은 컷들과 함께 나열된다.상당히 역설적이다. 그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분명하게 남아있을 수 있지만 사람들의 대화는 불분명하며, 장소의 지표성은 부재하지만 사진과 같은 지표적 매체를 활용해 장소를 정박한다. 이렇게 역설을 나열하여 그러한 역설에 관해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의 말하기 방식은 역설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작품과 함께하도록 만든다. 마치 ‘명’과 ‘납’이 함께 사랑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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