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장치, 유희하기
사람의 눈으로 포착되지 않는 진실, “말이 달리는 동안 네 발을 지면에서 완전히 떼는 순간이 있는지”를 포착하기 위해 에드워드 마이브릿지는 12대의 카메라를 설치했다. 이 12개의 연속 사진을 일컫는 ‘움직이는 말(1878)’은 최초의 영화로서 우리에게 헌정된다. 이 최초의 영화, 마이브릿지의 ‘움직이는 말’이 주는 영감은 여전히 유효하다. 예컨대 조던 필의 <놉>에서, 시각은 곧 권능으로 표상된다. 포식자는 ‘봄’으로써 인간을 집어삼킨다. 피식자-인간-은 눈을 감아야 포식자를 피할 수 있다. 이때, 피식자가 카메라 렌즈를 경유해 초월적인 존재를 포착하는 순간, 피식자와 포식자는 전도된다. <놉>이 직시한 것은 초창기 카메라가 발광하던 시기, 자연의 것이었던 시각에 발생한 위계, 카메라 기계와 대상화되고만 인간, 뒤바뀐 권능, 영혼을 빼앗는 기계라는 음모론의 파라노마다.
반면 <그림자의 방>은 ‘움직이는 말’의 권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림자의 방>은 마이브릿지의 ‘말’을 스크린에 불러오는 듯 보이나, 이를 재현하기보단 유희하는 데 관심을 둔다. 얼룩이 새가 되고, 새는 날아오른다. 코끼리, 고릴라, 말이 겹쳐 보이며 유년기 아이의 것 같은 그림자놀이가 펼쳐진다. 이 그림자놀이는 전사나 최초에 대한 헌사나, 모션 픽쳐(영화)가 성립되기 위한 조건을 천진난만하게 지나쳐간다. 단연 흥미로운 점은, 스크린에서 재생되는 동물들이 프레임에 갇혀있다는 사실이다. 감독 옥세영은 의도적으로 프레임의 테두리를 노출시키고, 이 프레임을 여러 겹으로 겹치기까지 하며, 스크린을 보는 관객을 속이기 위해 ‘투명한 장치’로 존재해야 할 프레임의 의무를 저버린다. 기꺼이 비가시적이어야 마땅한 매체의 물성을 실토하며, 프레임이 겹치지 않아야 선명한 상을 맺을 수 있는 매체의 원칙을 위반한다. 이때 관객은 두 개 이상의 매체를 경험한다. 3D 애니메이션으로 보였던 작품이, 여러 장의 일러스트 아크릴 판으로 이루어진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임을 실감한다. 이 아크릴판의 물성을 필름과 유비하자면, 픽셀은 필름으로, 필름은 픽셀로 자유로이 오가는 셈이다.
이는 무엇을 선포하는가? 속도는 더 이상 셔터스피드에 의한 것이 아니다. 겹쳐지는 아크릴판 가운데, 일정한 사이즈의 단면에 인화된 머이브릿지의 말은 해방된다. 선명하게 달리는 말의 형상은 얼룩지고, 예측 불가한 생물들이 튀어나온다. 필름과 프레임은 더는 단일한 카메라의 권능이 아니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며, 전시되어 있는 수십장의 아크릴판을 보면 이러한 매체의 ‘경계 넘음’은 더욱 명쾌해진다. <그림자의 방>은 (영화) 매체의 선명한 국적에서 출발한, 국적의 종결, 무국적성에 관한 선언이다. 자, 놀이가 시작된다.
글. 박솔빈. 네마프2024 비평웹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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