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의 호흡을 모방하기:
‘체화體化’ 혹은 ‘체화體花’의 논리에 대하여
식물은 침투하고 뿌리는 파고 든다. 식물과 동물을 구분하는 가장 직관적인 기준은 (사실 이것이 사실 그리 정확하지 않을지라도) 움직임의 여부일 것이다. 근대 이전까지 식물은 ‘동물動物’이 아닌 것으로 정의되어 왔다. 동물은 먹이를 찾아 헤메고, 식물은 정주한다는 것이 이 개념을 지지하여 왔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식물도 움직인다. 구태여 녹조류나 포자 등의 사례를 들지 않고 가장 고전적이고 친숙한 형태의 식물을 사례로 든다고 해도, 식물은 움직인다. 예컨대 (고전적 의미에서) 동물은 먹이를 찾아 횡적으로 떠돌지만, 식물은 에너지를 찾아 종적으로 파고 들며, 자라난다. 식물의 뿌리는 수분을 찾아 아래로, 더 깊은 아래로 향하고, 잎은 빛을 찾아 위로 고개를 치든다. 이러한 움직임은 철근 콘크리트 표면의 미세한 틈바구니라도 파고드는, 엄연한 운동이다.
홍승기는 그의 영화 ‘체화體化’에서 식물의 호흡을 모방한다. 애니메이션을 통해 설화적으로 묘사되는 인트로를 통해, 주인공 다빈의 존재를 설명한다. 다빈은 “자연을 사랑한 소녀”가 꽃가루를 수분하여 만들어낸 “꽃도 인간도 아닌” 아이이다. 다빈은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성별 이분법에도 쉬이 포섭되지 않고, 학교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질서인 ‘점심시간’의 식사에도 동참하지 않는다. 다빈은 뒷산 터널 너머로 사라질 뿐이다. 다빈의 짝은 그 뒤를 밟다가, 다빈의 신체(와 성기)가 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목격하고 소문을 낸다. 다른 아이들은 진위 여부를 파악한다는 핑계로 다빈을 공격하고, 다빈은 이들에게 자기 씨앗을 급식에 섞어 먹이는 방식으로 복수한다. 이 씨앗을 먹은 아이들의 성기에선 이내 꽃이 자라나고, 모두가 햇빛을 받아 전신에 꽃이 피어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다빈은 공고히 유지되던 사회 질서들의 틈바구니를 파고들며, 그 균열에 씨앗을 심고 뿌리를 내려 꽃을 피운다. 다빈이 복수를 결심할 때 책상 아래에서 숨어 있다가 일어나고, 살짝 벌려진 급식차를 위로 열어 재끼는 것은 그가 종으로 자라나 피어나는 식물의 호흡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빈은 식물을 ‘모방’할 뿐이지, 꽃이 아니며, 인간의 외양을 갖춤에도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빈은 ‘꽃이자 인간인 아이’가 아니고, ‘꽃도 인간도 아닌’ 그 사이의 존재이다. 다빈의 존재 자체가 정의와 규정 바깥의 영역에 위치하며, 이것은 인간의 인식 체계에 반한다. 인간은 정의와 인과로 사고하려 하고, 이에 포섭되지 않는 존재는 언제나 괴물의 형식으로 현현한다. 이것이 영화의 후반부가 호러의 형식을 띠는 이유이다. 인간의 인식론에 정면으로 반하는 괴물의 형식으로, 다빈은 상대의 온몸에서 싹을 틔워내는 복수를 한다.
이 ‘꽃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다빈의 복수는 꽤나 특이하다. 그의 복수는 자기완결적인 동시에 자기파멸적이다. 다빈은 스스로 꽃이 되기로 결정함으로써, 하나의 체제에 편입되기를 결심하고 바닥에 누움으로써, 자신의 본질을 유기함으로써 자신의 복수를 완성하는 탓이다. 따라서 이 복수는 평온한 동시에 서글프다.
허나 이러한 미래가 언제나 최선은 아닐 것이다. 이 영화에는 설화적 존재인 다빈의 조부모를 제외하면 ‘어른’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빈의 모체도 “소녀”로 묘사될 뿐이다. 인간과 꽃 사이, 정의와 규정 사이를 또 하나의 매무새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참된 어른’이 어딘가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는 세계도 있을 것이다.
글. 유미주. 시각문화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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