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한 미래와 사라질 과거 사이에서
: 김현원, 윤병현, 홍유라의 <경계의 고도>에 관하여
영화는 재개발을 앞두고 있는 서울의 달동네 ’정릉골‘에 대하여 다룬다. 과거의 자료들─신문 기사와 지도, 사진 등─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암시되듯, 이곳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된 것처럼 보인다. 정부의 단속을 피해서 낮에는 허물고 밤에는 세우는 과정을 반복하며 어렵게 통과해 온 시간들. 그 시간은 이제 곧 완전한 과거가 될 것이다. 영화는 아파트 단지와 고가 도로 사이에 낮게 깔린 판자촌이 비집고 들어선 풍경을 파노라마로 보여준다. 아파트와 도로 모두 땅보다는 하늘을 향해 솟아있고, 그것들 사이에 낮게 끼어 있는 판자촌의 이질성이 새삼스럽다. 순서상 판자촌이 먼저였을 것이지만, 그것은 중요치 않다. 그곳은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이제 곧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언덕길 곳곳에 버려진 가구와 살림살이가 산처럼 쌓여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수거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멈춰있다.
집들은 비어가고 언덕에는 더 이상 사람이 오가지 않는다. 고가 도로 위를 끊임없이 통과하는 차량의 행렬과 대비되는 장면이다. 영화는 구글맵을 통해 동네의 구석구석을 살핀다. 줄지어 늘어선 쓰레기와 이사를 알리는 벽보, 재개발을 반대하는 현수막들. 정지된 풍경을 뒤로 하고 아파트 단지의 모습이 흘러간다. 이어지는 장면에선 포크레인이 쌓여 있는 쓰레기를 처리한다. 영화는 중층의 프레임을 통해서, 겹겹이 쌓인 이미지를 통해서 한 공간에 쌓여가는 시간의 무상함과 덧없음을 암시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의 소망처럼, 정릉골은 뉴타운으로 재탄생할 것인가? 영화는 재개발을 향한 사람들의 기대와 희망을 섣불리 비판하거나 쉽사리 재단하지 않지만, 동시에 아쉬움을 숨기지도 않는다. ‘과거가 없는 사회’에 대한 우려를 표하는 성북문화원 관계자의 목소리를 빌어서 말이다.
영화는 구글맵을 통해 특정한 과거의 시점에 고정된 정릉골의 모습을 보여주고, 이를 카메라가 포착한 당시의 정릉골 모습과 나란히 병치한다. 이들은 서로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정릉골은 곧 허물어질 것이다. 과거의 소멸과 현재의 탄생이라는 변곡점에서, 카메라가 담아낸 정릉골의 현재는 이제 구글맵이 포착했던 과거로만 남게 될 것이다. 영화의 첫머리에 보여줬던 사진과 기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과거의 특정한 시점에 고정된 순간으로 말이다. 외부자의 시선으로 소멸과 탄생이 교차하는 장소를 바라보며, 영화는 특정한 입장을 내세우거나 뾰족한 결론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어떠해야 한다’는 당위의 차원이 아니라,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제기와 질의의 차원에서, 도래한 미래와 사라질 과거를 아파트 단지와 달동네 언덕길의 이미지로 교차한다.
‘경계의 고도’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미래가 될 현재(아파트 단지)와 과거가 될 현재(달동네)를 가르는 경계는 높이에 있다. 아파트 단지는 하늘로 솟아 있는 반면, 달동네 판잣집들은 대지에 낮게 붙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높이는 단지 물리적 차원이 아니라 관념적·인식적 차원에 가깝다. 무엇을 또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각각의 높이에서 과거와 현재는, 소멸과 생성은 어떻게 교차하는가? 시간이 흐르면 현재는 결국 과거가 될 것이고, 미래는 현재가 될 것이다. 무수한 교차가 끊임없이 지속하는 세계에서, 시간의 흐름은 어느 고도에서도 피할 수 없는 일일 테다.
김윤진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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